내가 진상손님

 

코스트코에서 화장실휴지, 키친타월, 세제 등 부피 큰 물건들을 사서 차 트렁크에 실으려던 참이었다. 마침 자동차 리모컨이 가방 깊숙이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트렁크를 열려고 차 번호판 옆의 고무 스위치를 누르다가 고무가 녹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래전 차를 처음 샀을 때 열쇠 없이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여는 것이 신기해 몇 번 써보곤 거의 사용을 않던 것이다. 주로 리모컨을 사용했기에 언제 녹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고무가 녹아 흘러 범퍼에 검은 얼룩을 남겨놓은 것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햇살 강한 캘리포니아 날씨라지만 부품이 녹아 흘러내린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집으로 가는 대신 딜러의 서비스 센터로 갔다.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 아줌마가 트렁크스위치가 녹았으니 바꿔 달라고 떠들어대니 감당이 안 됐는지 사무실에 있던 서비스 매니저를 불러왔다. 나는 흥분하면 목소리가 떨리며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방금 한 똑같은 말을 매니저에게 다시 하려니 더욱 짜증이 났다. 목소리가 격앙됨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하세요. 어린애처럼 행동하며 계속 소리를 지르면 도와줄 수 없고, 저는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겠습니다.”라는 매니저의 말이 무례하게 느껴졌다.

 

미국에서 근 20년을 살았음에도 영어로 조리 있게 반박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Why are you yelling at me? (엄마 소리 지르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목소리를 낮추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KIM’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보았기에 한국인이면서 끝까지 영어만 쓰는구나 하는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큰누나뻘 되는 영어가 불편한 한인여인을 도와주지 않다니 서운함마저 들었다.

 

그는 컴퓨터로 찾아보더니 내 차의 5년 보증기간이 지나서 무상수리는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차를 여러 번 자기 딜러에서 산 기록이 있으니 본사에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부품은 딜러가 부담하고 인건비 200달러를 내라는 답변을 들었다. 부품의 전적인 하자를 인정한다는 뜻인데 200달러를 부담하기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약이란 말처럼 며칠 지나니 흥분과 화가 가라앉고 한국인 서비스 매니저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미국 땅에서 영어를 쓰는 것이 당연하고 같은 한인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불만사향을 가진 손님을 만나겠는가. 그는 일종의 고충처리 반장이 아닌가. 감정노동자로서 감당할 스트레스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도 가발 소매업을 하며 진상손님을 가끔 만난다. 위생상 이유로 가발은 교환과 환불이 불가능한데 막무가내인 손님을 만나면 피곤하다.

 

5년 워런티의 원칙에서 벗어나므로 무상서비스가 불가하고 부품을 제공할 테니 인건비를 부담하라는 것이 그로서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양보한 최상이 아니었을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 못 할 일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그날 진상손님으로 비추었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7/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