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어릴 적엔 이사하는 사람이 너무 부러웠다. 며칠간 결석한 친구에게 물으면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나는 매일 같은 집에서만 살고 있는데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엔 셋방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나마 우리 부모님은 황해도에서 서울로 오신 후 돈암동에 작은 한옥 하나를 장만하신 덕에 우리 가족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었다.
대학 일 학년 가을,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고 이듬해에 아버지는 이사하셨다. 태어나 처음으로 집을 옮겼다.당시 서울 외곽엔 개발 붐이 일던 터라 새집 건축이 한창이었다. 시내에서 좀 멀긴 했어도 지금까지 살던 한옥이 아니라 현대적인 외양과 입식 부엌을 갖춘 예쁜 집에서 엄마 없는 새 삶이 이어졌다.
누구는 내게 역마살이 있다고 말한다. 결혼한 후부터 나는 셀 수 없이 이삿짐을 꾸리곤 했다. 단칸방 전세에서 시작한 신혼은 일 년이 지나 방 두 개의 전세로, 또 한 해가 지나며 아기가 태어나자 방 세개가 있는 전셋집으로 옮겼다. 열심히 노력하여 처음으로 마련한 우리 집에서 한참 동안 이삿짐을 싸지 않아도 될 안도감을 누릴 무렵 남편의 뉴욕지사 근무발령이 떨어졌다. 이번엔 동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갈 짐을 싸야 하는 터, 이사의 형태도 예전과 달랐다. 무작정 생활도구를 다 실어갈 수도 없어 많은 살림을 정리하고 버려야 했다. 다시 뉴욕에서 엘에이로 이동발령을 받고 또 보따리를 쌌다. 이쯤 되니 난 어려서 그리도 부러워했던 이사가 무섭기까지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귀국명령에 따라 미국의 짐을 한국으로 옮겼다. 유치원에 다니던 큰 아이는 제 나라의 말도 글도 잘 몰라 매일 울고 돌아왔다. 이사를 함으로써 자리가 바뀐 것은 단지 생활터전과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머릿속 생각과 교육, 한국의 생활양식을 새로이 정립해 주어야 하는 커다란 과제를 내어놓았다. 남편의 3년 여의 미국 주재원 시절 동안 나의 사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바뀐 듯하였다. 무언가 한국 사회의 개념들이 다르게 느껴졌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시간의 간격은 있었지만, 교직에 복귀하고자 시도했을 때 너무도 큰 벽이 가로막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짐을 쌌다. 남편은 직장을 정리하고 일찌기 미국에 온 언니의 초청으로 이민수속에 들어갔다. 남편 역시 주재원 근무 후 돌아간 자리가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즈음 아이는 빠르게 한국학교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 아깝긴 했지만 잘 익힌 한국말과 글을 지켜주리라 마음 먹었다. 마흔의 나이가 된 큰딸은 지금도 Korean 을 말하고 읽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대성공이다.
엘에이에 자리를 잡고 이사를 한 숫자도 만만치 않다. 처음 일 년은 2베드룸 아파트에서 시작한 이민의 삶이었다. 3년째 되던 해에 미국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그 날, 나는 외쳤다. 이 집에서 죽겠노라고. 다시는 이삿짐을 싸지 않겠노라고. 내 결심은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 30년이 넘는 이민생활 동안 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그래도 젊은 날에 비하면 양호한 비율이다. 비교적 가까운 범위에서 행해진 이사였다. 가정 안에서 많은 일이 생겨날 때마다 아이들이 받을 변화의 영향을 줄이려 노력했다. 끔찍했던 노스리지 지진을 겪고서도 지금까지 밸리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이곳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도 큰 축복이다.
이젠 정말 마지막일까. 나는 지금 이삿짐을 싼다. 사위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혼자가 된 딸아이와 지난 8년을 함께 살았다. 이 가을, 딸이 재혼을 준비한다. 손자도 중학생이 될 만큼 자랐으니 돌보아야 할 내 몫도 줄어들었다. 이제 나 혼자만의 남은 삶을 위해 새 터를 마련했다. 나이가 들면서 행동반경도 줄어들고 사회활동의 기회도 뜸해진다. 분주했던 지난 삶 속에서 지녔던 많은 소유물과 상념들을 없애고 지워야 할 때인 것 같다.
이사를 하는 일이 단순한 생활터전의 변화 만은 아닌 듯하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생각까지도 함께 이동하는 탈출의 개념도 있는가 보다. 싱글 맘으로 살아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애탔던 마음으로부터 새로운 배필을 맞아 행복해할 모습을 그리며 감사의 기도로 바뀐다.
난 이제 다시 길떠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어느 날 완전한 자유로움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를 때까지 이 자리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