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매일 아침 등굣길은 학부모와 아이들로 복잡하다. 6학년 새 학기를 맞은 손자녀석도 제법 큰 소년티가 난다. 조금씩 어른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 손을 잡아도 슬며시 뺀다.
시간은 말없이 흐르면서 커가는 아이 마음 안에 많은 생각을 담아두었다. 때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치 어른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애틋한 내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들 속으로 내달음치고 만다. 나 혼자의 외짝 사랑이다.
누군가를 좋아함은 행복한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반장 아이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그 애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린 내 눈에 점잖아 보이는 모습이 어른 같았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우리를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졌던 사랑의 감정이었다. 여고 시절엔 독일어 선생님을 흠모했다. 독일어 수업은 지루했고 시험은 어려웠지만 난 항상 최고점수를 받았다. 선생님의 관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친절한 선생님의 시선과 칭찬은 늘 나를 설레게 하였다. 훗날 교직 생활을 하던 중 어느 교사연수에서 그분과 마주쳤을 때 철없었지만 심각했던 당시의 내 모습이 떠올라 웃었다. 역시 나 혼자만의 풋사랑이었다.
대중적인 짝사랑도 무시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큰 물질에서부터 욕심으로 가려져 있는 마음까지 모두가 한 방향 사랑의 대상이다. 여자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이 그것이고 드라마 속 주인공의 멋진 모습에 열광하는 것도 한마음이다. 연예인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경험하는 것이다.
짝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건 아닐까. 부모님의 일방적인 사랑 속에서 자랐고 지금도 우주와 자연의 보호 아래 산다. 그것이 아니라면 생명조차도 이을 수 없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외로워했고 아침 안개에 하루의 소망을 달았다. 내 마지막 호흡을 거두어들일 우주 안에서 숨 쉬며 살아온 오늘까지 미처 깨닫지 못한 숭고한 사랑이다.
조물주의 사람에 대한 사랑도 한 방향이리라. 나이가 들면서 돌아가야 할 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끝 모를 곳에서 왔으니 다시 영원으로 떠나야 하는데 과연 나는 그 사랑에 얼마큼 답하며 삶을 채웠을까. 애당초 내가 짝사랑의 대상이란 엄청난 사실마저도 눈치채지 못한 긴 시간이었던 듯하다.
살면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때가 있다. 내가 정한 사랑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까닭이다. 나도 모르게 늘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고통이 따른다 해도 이겨내야 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일들이었다.
어디 일 뿐일까. 남들의 눈에 어찌 비치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어야 했다. 외길 사랑으로 끝난다 해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내가 행복했으므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 사랑하며 살았나. 부자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일했고 자랑스러운 자식들로 키우려 꽤 극성도 부렸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능력 과시를 위해 용기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부질없는 스스로에 대한 짝사랑인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 끝까지 갈 뻔 했다. 이젠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 왕복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그 때를 기다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