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포도의 계절이다. 8월이 되면 외사촌 동생이 생각난. 텍사스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어 자주 만나질 못한다. 나보다 살 아래인 사촌과는 어린 시절 한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여섯 형제 오직 막내동생인 외삼촌과 월남하셨기에 남매의 정은 가늠할 없을 만큼 깊었다.

그 애와 나는 많이 다르다. 언니를 가진 나와는 반대로 남동생이 있다. 사내아이들의 놀이를 좋아했고 소꿉장난을 때도 아빠 역할을 맡았다. 내가 K여중 입시에 불합격하여 후기 여중에 다니고 있을 당당히 K여중 배지를 달고 나타나 뻐긴 이후 그 애를 멀리했다. 관계개선이 것은 그애가 나와 대학 후배로 입학을 후였다. 한 번도 내게 '언니' 부르지 않던 사촌 동생으로부터 대학생이 다음에야 선배대접을 받았다

여름이 한창인 어느 날이었다. 810일생인 사촌의 생일쯤이라 기억한다. 꽃밭에는 온갖 색깔의 꽃들이 뜨거운 아래에서 노래하고 마당 수돗가의 물통엔 수박이 몸을 식히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만드신 평상에 앉아 포도를 먹었다. 검은색을 익은 포도송이는 어린 우리 앞날의 꿈을 품어 키워주는 단단하고 윤기가 흘렀다. 가장 포도알부터 머리를 맛대고 질세라 숨 쉴 겨를도 없이 먹어치운 우리는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때 우리는 가지 약속을 걸었다. 50년 후의 여름날, 포도 먹기 경쟁을 기약했다. 계절에 상관없이 포도를 먹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8월에 있는 그애의 생일로 정했다. 올해에 동생이 회갑을 맞는다.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새삼스러워 가슴이 따뜻해진다.

젊은이는 앞날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난 얘기에 마음이 움직인다고 한다. 육십여 동안 사촌 동생과 나는 참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시간의 기억들을 공유하고 이제 삶의 후반기에서 마주하게 된다. 포도 먹기 경쟁의 약속을 그 애도 떠올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살면서 지키지 못한 약속이 얼마나 많은가. 섣부른 허세로 내밷은 말이 누군가를 실망하게 한 일은 수도 없다. 8월이 오면 약속을 지키고싶다. 송이가 아니고 박스의 포도를 앞에 놓고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그땐 모든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알았지. 살아보니 정녕 계획은 그저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8
월의 태양 볕은 그때도, 지금도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