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2중주

내겐 딸이 있다. 작은딸이 서른다섯 살이 되었으니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다. 요즈음엔 아들보다 딸이 부모와 가까운 이유에선지 나처럼 딸딸이 엄마가 은메달이란다. 애절하게 아들을 기다리던 시대와는 참으로 다른 세상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아이는 성격이나 행동거지, 걷는 뒷모습까지 아비를 닮았고 작은딸은 나와 너무도 흡사하기에 우린 일찌기 가르기에 익숙했다. 친척들마저도 아이의 아빠, 작은딸의 엄마로 통했다. 법대 재학 중에 만난 백인과 결혼한 큰딸은 한국, 미국을 반반씩 닮은 손자녀석을 선물해 주었다. 작은 딸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다. 상담심리로 대학원을 마친 고등학교의 카운슬러로 일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중학교 교편생활을 했던 자리를 이은 같아 마음이 푸근하다. 대학생활 이제껏 혼자의 삶을 관리하는 아이를 나는 신뢰한다. 덩치보다도 마리를 절친한 친구로 삼고 시집갈 생각은 전혀 하질 않는 답답함만 아니라면 잡을 일이 없다.
 

살과 달 된 딸들을 데리고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생활터전을 잡느라 혼신의 힘으로 살아오면서 언제나 아이에게 최우선을 두었다. 연습 없는 자식기르기에 지름길도 찾지 못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저만치 쏟아지는 비를 먼저 뛰어가 맞으며 그들을 지켰다. 행여 너무 미국적인 아이들이 될까 봐 우리의 사고를 심어주며 균형있게 자라기를 소망했다. 남편은 엄마와 딸들이 함께 시간을 많이 갖도록 배려해 주었고 나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어 주려 아이들의 얘기 들어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성공한 보다는 고통의 체험을 들려주었고 아름다운 사람과의 만남에서 행복을 찾는 가치를 얻을 있도록 이끌었다.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여행을 다녔고 젊은이들의 문화를 익히고 새로움을 접해보려 많은 노력도 하였다. 시간은 곱게 쌓여 성실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났고 충실한 삶의 주인공들이 되었으니 이젠 어느만치 우리의 숙제를 끝낸 셈이다.

얼마 작은 딸과 여행을 했다. 여름방학 동안엔 배낭 하나 메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멋진 아이다. 세상 떠난 남편 생각에 쓸쓸해 하는 어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모처럼 시간을 내어 주었다. 우리는 시애틀과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길을 떠났다. 꾸며진 관광지보다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싶었고 숲 속의 새들을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딸아이와 함께 있기 만으로도 귀한 시간이었기에 모든 자연은 아름다웠다. 사막도 지나갔고 높은 고개도 넘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사이 쪽빛 물의 작은 호수도 보았다. 2 마일이 넘는 길을 번갈아 운전대를 잡으며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엄마의 어린 시절의 얘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의 마음은 옛날로 뒷걸음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문득 엄마도 그리워졌다. 나도 한때는 사랑받던 딸이었거늘.
내가 엄마가 되어 딸과 맺은 인연이 참으로 오래 되었고 아이는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나무로 있었다. 결혼 25년을 기념하며 남편과 내가 여행했던 길을 딸과 함께 걸었다. 오랜 친구 같은 부부가 되기를 원했는데 그는 먼저 떠났다. 아이는 곁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려 애쓰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이젠 내가 아이들에게 기댈 때가 되었는가. 세상을 가진 같은 풍성함이 가슴에 젖어왔다.
     

우리 모두는 삶의 연주자이다. 때론 불협화음이 되어 나온다 해도 끝까지 연주를 마칠 일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오케스트라에서 각기 다른 악기로 삶을 표현한다. 오늘도    다른  하모니를 일구며 자기의 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훗날 나마저 떠나면 우리 딸은 어떤 노래를 들려주려나. 부모가 그토록 만들고자 애썼던 아름다운 2중주를 기억해 준다면 행복하겠다찬란한 태양을 노래하는 희망의 멜로디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