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국

 

새벽공기를 맞는다. 이번 주는 내내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온다는데 아직 하늘은 먹구름을 힘겹게 매달고 있다. 며칠 전 뿌린 비로 복숭아나무의 꽃망울이 터지고 성질 급한 자목련도 하품한다.

아침마다 동네 골목을 걷노라면 각기 다른 모습들의 삶이 보인다. 부지런한 강아지는 주인 출근길을 배웅하며 무사한 하루를 빌어준다. 모퉁이 집 앞뜰엔 배달된 조간신문이 젖은 잔디 따라 퍼지는 물방울을 머금고 있다. 아마도 그 집 사람들은 밤늦게 퇴근하는 직장을 가진 걸까. 곧 굵은 빗줄기가 쏟아질 기세다.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코스를 돌아온다.

 

주중 아침 시간은 가장 바쁘다. 손자의 도시락과 등교 준비를 해야 한다. 학교에서 공급하는 점심을 주문하여 먹일 수도 있지만 건강한 메뉴가 아니라서 오랫동안 내가 해온 일이다. 반은 백인의 혈통이 섞인 아이인지라 우리 음식에도 맛들이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젖떼기를 할 때부터 다양한 죽과 부드러운 밥을 먹였기에 한식도 익숙하다.

 

이제 나만의 시간이다. 모두가 자기 자리로 찾아간 뒤에 남겨진 적막함이 두려울 지경이다.

남편이 아프다는 이유로 평생토록 놓지 못했던 일에서 손을 뗀 후 자연스럽게 은퇴에 이르게 되었다. 이젠 누군가가 내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해도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그만큼 자유로움에 길든 나를  본다.

얼마나 오랜동안 남을 위해 살았는가. 나의 젊음, 시간과 지식, 노동력과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바쳐오지 않았는가. 아니 나를 내어 팔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었던 세월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거듭하지 않으리라. 이제는 나를 위해 쓰이는 내가 되겠다.

  

신선한 커피를 내린다. 집안 가득 하와이안 헤이즐넛의 향기가 연무처럼 스민다. 오늘 아침만은 컴퓨터 책상 앞이 아닌 식탁에 자리를 잡는다. 팔걸이가 있는 의자를 끌어다 최대한 창문을 마주할 수 있도록 테이블과 넉넉한 간격을 유지해 앉는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련한 그리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온몸이 한바탕 진저리로 일그러지다 균형을 찾는다. 내 곁을 스치고 떠나간 많은 이들도 비처럼 어디론가 모여 흘러갔을까.

뒷마당 한편 움푹 팬 곳에 쉴 새없이 빗줄기들이 부딪히며 동그라미를 그려놓는다. 크게 작게 퍼지며 곧 사라져버리는 물 자국을 찾아본다.

 

오묘한 물의 존재를 새겨본다. 생명유지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물은 어쩌면 너무 흔하기에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엔가로 흘러가 돌아 나오며 수없이 자신의 모습을 상대의 생김새에 맞추는 양보와 관용의 상징이다. 나도 누구에게든지 그 마음속에 흘러들어 그를 적시고 행복으로 이끌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물이 되고 싶다. 메마른 가슴 속을 촉촉이 적셔주며 아픈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그런 치유의 물이고 싶다.

내 삶에도 얼마나 많은 동그라미가 서로 부대끼며 밀어내다가 때론 얼싸안으며 자국들을 만들어 놓았는가. 흔적을 찾지 못한다 하여 기억마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고단한 등 뒤에서 피어오르는 빛을 향한 손짓이 세차다.

 

새로운 시작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야말로 바로 시작할 시간이라고 했다. 

더는 주저할 이유도, 두려워할 대상도 없음이다. 살아오는 동안의 많은 실패와 착오들을 교훈 삼아 늦기 전에 나의 성을 완공해야 한다. 물샐틈없이 정교한, 웬만한 바람에도 끄떡없는 철옹성을 짓자. 커다란 성문 만들기도 잊지 말자.

누구라도 노크하면 달아가 활짝 열어 맞이하리라. 살아있는 동안 한 사람이라도 더 손잡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으리. 서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