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수십 개의 원이 부딪히며 깨진다. 훅~ 하며 불어올린 비눗방울들이 잠깐 허공에 퍼지다 사라진다. 어떤 것은 혼자 떠다니다 꺼지는가 하면 서로 엉기어 부서져 가는 것도 보인다. 오랜 시간 머물지 않지만, 서로를 완전하게 품었다가 놓아주는 듯 보이는 것이 정겹다.
내가 어렸을 땐 물에 비누를 풀어 방울놀이를 했다. 요즘엔 아예 비눗물과 방울 만드는 도구까지 포장한 것이 있어 손자는 내게 조를 일이 없다. 마당 한구석에서 시작한 비눗방울 놀이는 점점 가운데까지 퍼져 하늘이 온통 동그라미의 춤판이다. 손자녀석은 정신없이 떠오르는 비눗방울들을 두 팔로 휘저으며 터뜨리느라 숨이 가쁘다. 방울 사이로 스치는 햇빛에 잠깐씩 무지개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금방 녹아 사라져버리는 것이 마치 우리가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환희의 순간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습같다. 고통의 길에서 문득 마주치던 짧은 빛의 여운을 기억한다. 오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지만, 나는 늘 허공을 헤매다 넘어지곤 했다.
동그라미는 예쁘다. 크면 큰 대로 마음이 넓어지는 듯하고 작은 것은 귀엽고 따뜻한 느낌이 난다. 모나지 않게 연결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어디로 가든 함께 움직이고 흩어지지 않는다.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힘을 지닌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가 동그라미로 만든 바퀴라고 한다. 크기에 따라서 이동하는 거리가 다르고 어떤 생산품에라도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아주 작은 시계의 부속품도 들여다 보면 많은 동그라미로 연결되어 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우리 생활 속에서 동그라미의 쓰임새는 흔히 볼 수 있다.
자연은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달도 둥글다. 직선으로 뻗어 흐르는 강은 없으며 산줄기의 모양도 웨이브를 그린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부드러운 곡선을 볼 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도 아마 곡선으로 이어져 있으리. 각진 모양의 심장 사진을 본 적이 없다. 곧게 뻗는 것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러질 테지만 유연한 그것은 휘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 아닌가. 다소 원래의 모양이 바뀐다 하더라도 곡선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각진 모양을 좋아하는 편이다. 둥글고 넓죽한 얼굴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삼각 또는 네모형의 목선을 가진 옷을 고른다. 그릇도 직사각형이나 정 네모형의 것이 많고 가구도 반듯한 디자인이 정돈되어 보여서 좋다. 곡선 보다는 직선을 선호한다. 고집이 세어서 때로는 별스럽게 구는 일도 많다. 원만하지 못함을 깨닫지만 쉽게 고쳐지질 않는다. 다른 이들과 생각을 맞추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리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엔 타협하며 지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아집은 더욱 굳어지는 것 같다.
한 점에서 시작한 동그라미는 처음의 자리에 돌아와야만 원을 만들 수 있다. 오른쪽으로 돌리든 반대편으로 그려가든 자기의 한계만큼 벌어졌다가 다시 아물리는 과정을 통해 원래의 시작점과 일치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 동그라미를 갖고 있다. 어떤 이는 아주 크고 멋진 원을 완성할 테고 찌그러진 모양을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각자 스스로 그려내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모난 생각을 다듬고 많은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예쁜 동그라미가 되고싶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둥근 찻잔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감은 원의 한 귀퉁이를 이어가는 작업이다. 아주 정성껏 즐거운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 '인생은 미완성' 이라 노래했지만, 각자의 다른 삶을 통해 만들어진 동그라미는 모두가 위대한 완성품이다. 헬륨으로 채워진 풍선이 하늘 높이 떠오르듯 언젠가 내 생의 동그라미가 드러날 때면 나도 사뿐히 날아 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