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꽃 동산
김화진
랭카스터의 바람은 뜨거웠다. 내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50마일 쯤 떨어진 그곳에 두어 번 봄날 들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파피가 온 산을 뒤덮으면 마치 천국에 발을 딛고 선 것 같은 느낌이다. 사막의 모습을 감추지 못한 지역에 몇 번 땅을 적셔 준 지난 겨울비로 노란 꽃을 피워내어 봄의 전령사가 된다.
한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S의 남편은 한국전쟁 참전군이다. 이젠 80살이 넘은 백인 노신사지만 기개 만큼은 젊은 군인의 기상이다. 은퇴 후 꾸준히 해 오는 봉사활동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의6.25전쟁,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었던 베테랑을 방문 위로하는 일이다. 그의 아내는 한국 무용과 국악의 재주를 갖고 있어 위로공연을 함께 보여준다. 몇 해전부터는 아예 한국 고전무용단을 구성하여 조직적인 무대를 만들고 있다.
지난 6월23일, 한국전쟁 66년 째를 앞두고 내게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리듬 사물놀이 공연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나는 지역 합창단 사물놀이 팀에서 북 장단을 맡아 연주하지만 그렇다고 고수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다. 대학시절부터 막연하게 서양 드럼을 배우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기회를 갖는 일이 어디 그리 쉬웠는가. 여러 개의 타악기를 놓고 음악 전체의 리듬을 아우르며 적당한 곳에서 결정적 클라이막스를 이끌어내는 드럼의 매력이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두 손과 발을 함께 이용해야 하는 드럼을 대신해서 한국 리듬의 최고조인 사물놀이를 접하게 되었다. 장구와 꽹가리, 징과 북의 네 악기는 각기 자연의 소리를 표현하며 우리 가락의 흥을 돋운다. 서양악기 드럼에 못지않은 장단이 결코 쉽거나 간단히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문단은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며 일단 나이가 많은 것에 놀랐다. 현대무용을 전공했다는 한 분은 북춤과 서양춤을 모두 공연한다고 했고 현직 한의사와 간호사 출신의 두 분도 오랫동안 익힌 한국무용의 수준이 남달랐다. 어찌 각자의 일을 하면서 노년 초기에 이르는 나이임에도 지치지 않고 봉사하는가. 게다가 공연 준비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늬 전문가와 다를 바 없었다. 무대화장용 도구가 가득했고 분장 솜씨도 놀라워서 난 그저 입을 벌린 채 구경하기에 정신이 나갔다. 사물놀이를 공연하기 위해 저만큼 짙은 화장을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앤틸롭 밸리의 사막에 위치한 도시 랭카스터. 엘에이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사막성 열풍이 부는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라서 주거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최근에 주택개발이 활발해 지면서 저렴한 값의 새집을 살 수 있는 장점으로 젊은 가족들이 많이 이주해 사는 곳이다.
거기에 참전용사들의 거주지가 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쉼터라고 했다. 전쟁 중에 부상을 입은 군인 중에는 보훈병원에서 수십 년 동안 병실 침대에 누워 살고 있다고도 들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참전용사들은 부상자는 아니었지만 이제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이가 들어 스스로 살아가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정기적 위문방문을 하는 이들의 말로 올 때마다 그들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한다.
공연을 위해 걸어가는 복도에 커다란 선반이 있었다. 늠름한 군인이 성조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 무공훈장들이 전시되어 있다. 열 여덟에서 스무 살쯤의 나이다. 그들은 단지 명령에 따라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KOREA'라는 나라로 목숨을 내어놓고 갔던 사람들이다. 수 없는 전사자가 있었고 그 중 살아 돌아온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고운 모습, 지금은 모두 80, 90세의 노병 참전용사다.
한국의 춤과 가락을 보는 그들의 눈빛이 소리없는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이따금씩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지 촉촉히 눈물이 고인다. '아리랑'가락이 들릴 때 어느 노병은 낮게 따라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귀에 익숙하게 남아있다며. 아마도 그 시절 우리 민족에게 쉽게 흥얼거리던 곡조인 듯 하다.
길지않은 시간, 순서가 끝나고 잠깐동안의 대화가 이어졌다. 모두가 고맙다며 아낌없는 박수로 환호한다. 우렁찬 소리는 아니었어도 마음이 전해오는 감사의 인사다. 휠체어에 앉은 이, 대부분은 지팡이에 의지한 걸음으로 다가 와 악수를 청한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정작 우리인 것을.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사막 바람이 불었다.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내가 6.25에 대해 말할 수있는 기억은 하나도 없다. 단지 역사의 기록과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몸서리치는 고통의 이야기를 통해 느끼는 것 뿐.
노병의 눈에 얇게 번지던 회상의 슬픔을 보았다. 오래 전 생사를 구분할 수 없었던 전장을 떠올리는 듯 했다. 행여 그들이 낯선 나라의 자유 수호를 위해 머물렀던 그 시간을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의 놀라운 모습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터이다. 가끔 한국에서 반미 구호를 목숨 걸고 외치는 이들을 본다. 인간관계에서도 작은 도움에 대해 감사할 줄 알거늘 어찌 도리를 모르는가.
작은 노력과 수고로 보답의 기회를 갖게 된 복된 날이었다. 내가 베푼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선물로 담아왔다. 다시 찾아올 때 만날 수 없게 될 지도 모를 노병을 위해 두손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