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김화진

 

밤새 무섭게 휘몰아쳤다. 해마다 캘리포니아에 세찬 바람이 부는 시기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지형을 이루는 우리 동네는 이름마저도 Valley . 창문을 통해 눈을 들면 산이 보이고 특히 암석 구조의 토질 때문에 건조한 외향의 풍광을 연출한다. 그런 연유인지는 없지만 유난히 바람이 맴돌아 치면 어느 도시보다 피해를 많이 입게 된다. 어제 온종일 거칠게, 무언가를 휩쓸어 내려는 쉴 새 없이 불던 바람이 마당에 펼쳐져 있던 모든 것을 자리바꿈해 버렸다. 작은 화분들도 넘어져 상처 입고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던 참새 먹이통의 파편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야외 테이블과 의자도 제자리를 벗어난 것이 조회시간 운동장에서 보았던 학생들의 삐뚤어진 대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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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운다' 말이 아주 부정적인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기혼 남녀의 불륜마저도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않는 개인적 사안이라 인정하지만, 어릴 친구의 아버지는 당당히 살림을 했다. 본가의 생활비를 받아오는 심부름을 맏딸인 친구가 맡아 나도 동행한 기억이 있다. 큰 회사의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무런 도덕적 가책이 없었던 보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친구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곤혹스러운 심부름이었는지, 아버지가 얼마큼 미웠는지. 그 엄마와 가족의 아픔도 느껴볼 있었다. 어찌 가족의 상처가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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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산다' 어떨까. 얼핏 현실을 피하고 노력없이 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사에 여유를 갖고 주변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으며 고고한 삶을 영위한다는 멋진 느낌도 있다. 어지간히 수련된 마음가짐이 아니면 자기의 주장대로 이끌어가는 생이 그리 쉬운 일인가. 너무 벗어나면 기인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다. 때론 나도 세상사에서 훌쩍 떨어져 나와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홀연히 떠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특히 사람과의 소통에서 사소한 감정 다툼으로 마음이 상할 땐 더욱 그렇다.

'바람을 타다'라는 표현은 매우 실속있게 들린다. 긍정적으로 삶에 바람을 적당히 끌어당기면 커다란 부수효과를 기대할 있을 같다. 때로는 사람 관계에서 혹은 사업상으로도 흐름을 타는 영리한 처세술이 된다. 돌아보니 나는 진작 이런 생각을 깨우치지 못하고 앞에 놓인 것에만 골몰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딸들도 정직한 직장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오래 전 한국에서 그 흔했던 소위 아파트 투기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아이들 학교 전학을 몇 차례씩 감행하며 평수를 늘려가던 친구를 보며 감히 따라 할 용기조차 품지 못한 채 재물 늘리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바람을 맞다'라는 말은 내게 크게 다가온다. 누구와 약속에서 상대가 나타나지 않은 경험은 별로 기억에 없지만 속에서 순항을 거스르는 바람을 이겨내느라 힘든 순간이 많았다. 뒤에서 살살 불어 속도를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이라면 얼마든 맞고 싶다. 반대로 나를 막아서는 역풍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쟁으로 끌어왔는지. 젊음은 그렇게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온 길의 자취는 없다. 단지 힘겹게 살아낸 삶의 기억 만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떠올리기 싫지만은 않으니 모든 지나간 일은 나름대로 소중한 자리를 채우는 모양이다.


언제 바람이 불었던가. 이튿날 아침 창밖을 보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땅을 적신다. 넓은 뒷마당에는 제철 맞은 노란 레몬과 오렌지가  싱그럽게 매달려 있다. 사람은 흰머리와 주름이 생기며 기력이 쇠하여 늙어가는데 나이가 많은 오렌지 나무는 한쪽 가지부터 말라가면서 차츰 수명을 다한다.
창고 뒤편에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다. 오십 년이 넘은 오렌지 나무다. 이미 검게 변해가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힘없이 넘어질 줄이야. 마르다 못해 가지 전체가 까만색으로 변해 있다. 나무였는데 뿌리까지 파어져 나와 있다. 그냥 삶을 통째로 놓아버린 것처럼 보인다. 저렇게 드러누워 있으면 편할까. 내가  희망을 계산하며 살던 시간을 떠나 보내고 허탈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던 순간마다 꿈꾸던 모습이 저랬으려나. 

바람도 잠잠하고 하늘도 맑아 온다. 세찬 바람도 조금만 기다리면 물러가고 빗줄기도 멈출 시간이 온다. 조급한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이 바람처럼 스쳐 간다. 그만하면 용케 견디어 세월이다.
지금 내 마음엔 바람이 분다. 억세지 않은 그리움의 바람이 너울거린다. 친구가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고, 어릴 적 부르던 노래도 불러보고 싶다. 그 속에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다.
이제 새해, 65세 생일이 되는 다음 달이면 메디케어 수혜자 자격을 갖는다.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인증받는 확실한 시니어다. 각종 혜택과 받을 있는 대접을 마다치않고 즐겨야겠다전 지역 국립공원 입장도 거의 무료다. 부담이 컸던 의료보험비도 많이 절약할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이 먹는 일이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니다. 길게 누운 나무처럼 가장 편한 자세로 새봄을 기다린다. 따뜻한 봄바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