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음자리표
세상엔 많은 악기가 있다. 각각의 개성 있는 소리는 함께 어우러져 웅장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아주 가냘픈 분위기도 연출하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어려서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서 그리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에는 피아노도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두꺼운 마분지 건반모형을 엄마의 재봉틀 위에 얹어놓고 손가락 연습을 하며 음계를 외우곤 했다. 나는 소질이 좀 있었는지 짧은 시간에 꽤 진도를 나갔다. 바이엘과 체르니 30번을 뗀 수준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음악 시간이면 내게 반주를 부탁하셨고 풍금 소리에 맞춰 친구들은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나는 선생님이 자주 음악 시간을 마련하시기를 기다리곤 했다.
공영방송국이었던 KBS 어린이 합창단에 뽑혀 중학생이 될 때까지 많은 활동을 했다. 라디오 방송프로는 물론 5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TV 방송이 시작되고는 줄곧 출연하는 모습이 화면으로 방영되었다. 여고시절에도 학교 합창단에서 열심히 노래 부르기를 익히고 즐겼다. 특히 새로 오신 음악 선생님의 준수한 외모 때문에 아이들은 앞다투어 합창반에 들어가려 했다. 나는 메조소프라노 파트를 맡아 하였고 2부 합창곡이면 알토를 노래했다. 음악 이론과 합창에 관한 공부를 익힐 수 있어 한때는 음악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기도 했다.
혼성합창단의 소리는 여성합창보다 훨씬 풍성하고 깊이가 있다. 제대로 된 혼성 4부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꿈을 키워온 나는 성당 성가대의 일원이 되었다. 멜로디를 끌고 가는 소프라노에 부드러운 알토 화음을 넣고, 맑고 높은 테너를 가미하면 깊은 우물 밑에서 퍼 올리는 저음의 베이스가 단단히 짚어주는 감성의 노래가 완성된다. 얼마나 전율이 느껴지는 화음인가. 많은 합창곡은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의 반주를 곁들여 하게 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화음은 아카펠라로 극치에 달한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효과음은 없을 것 같다. 절대의 감동 그 자체를 선사한다.
음악 이론을 배우며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 음자리표를 그린다. 어째서 그런 형태로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높은 음자리표는 오선의 처음 칸에서 둥글게 뻗어 오르기로 시작하여 순식간에 꼭대기를 치고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을 하는 형태가 된다. 반면 낮은 음자리표는 아래 음의 높은 칸에서 등을 굽히는 자세로 내려와 맨 아래 칸에 닿은 후 등옆에 두 점을 찍어 마무리한다.
이 다른 두 개의 음자리표는 우리의 삶과 같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도약하지만 계속 높은 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듯하다. 저 아래 나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에 발을 딛고 섰을 때 삶의 한 노래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낮은 음자리표가 더 좋다. 웬지 높은 음자리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높은 음을 내기가 힘겹기도 하지만 어디든 오를 때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게으르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난 시간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남보다 우뚝 서 있었던 시절도 기억에 없을 뿐더러 낮은 자리의 많은 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다. 외롭지 않았다.
오선지를 펴고 음표를 그린다. 약간은 허리를 숙인 겸손한 자세로 서서 마침표를 찍는 낮은 음자리표를 닮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 내 삶의 멜로디가 그려진 곡조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