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멈춤
밤새 불던 바람이 아침 햇살에 고개를 숙였나 보다. 앞뜰의 자작나무 줄기들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휘파람 소리에 잠을 설쳤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떨어진 이파리가 곳곳에 수북하다. 캘리포니아에 가을을 기다릴 이맘때면 찾아오는 산타아나 열풍의 위력이 상당하다. 한 주 내내 강풍 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모든 것이 멈춰 섰다. 갑자기 정전된 것이다. 디지털 시계도 움직이지 않고 컴퓨터 화면도 캄캄하다. 씽씽 돌아가던 세탁기의 가득한 물속에서 빨랫감이 출렁인다. 가스레인지 점화에도 성냥이 필요하다. 전력에 의지하던 그것들은 가던 자리에서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다. 예고되지 않은 멈춤 때문에 황당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없을까. 샤워 중이었거나 열심히 글을 쓰고 있던 사람들, 아니면 맛있게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을 수도 있겠다.
운전하면서 스톱 사인을 자주 만난다. 큰 도로에서보다는 사잇길 작은 골목에 많다. 스톱 사인을 만나면 무조건 서야 하는 것이 교통법규다. 사거리에서 두 곳만이 정차해야 하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 네거리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완전정차를 하고 상대방 운전자와의 눈 맞춤으로 지나갈 순번을 정한다. 서로 먼저 가려 한다면 위험하게 될 것이고 어떤 때는 각기 머뭇거리다가 정체가 길어지는 수도 있다. 마주친 사람들끼리 얼마만큼의 같은 생각으로 통하는가에 달린 셈이다.
얼마가 지났나, 다시 움직이고 있다. 전기시설 복구가 끝난 모양이다. 에디슨이 위대하다. 전기파워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새롭게 시간을 맞추고 세탁기의 버튼을 조정하고 컴퓨터를 다시 켠다. 모두가 가던 길을 계속해서 달린다. 시계도, 컴퓨터도, 세탁기도 제 일에 충실하다.
삶의 시계는 계속 흐른다. 그 속도와 세기를 결정하는 일은 내 몫이다. 일반도로에서는 낮은 속도로 주변을 살피며 교통 신호에 따라 움직일 일이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쉼 없이 달리는 얼마 만큼의 시간이 주어진다. 멈추고 싶다면 출구로 내려서 다시 속도를 조절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잠깐 멈춘다는 것은 계속 나아감을 말한다.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지나온 길에서 스치며 놓쳐버린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 멈춰 서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을 그때야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나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내겐 나쁜 버릇이 있다. 어떤 일에 흥미를 크게 느낀 경우라거나 좋아하지 않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집요하게 끌고 가는 고집이다. 그야말로 끝장을 볼 때까지 밀어붙이다 보니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때론 반대에 부딪혀 상처를 받기도 하고 혼자 가는 길에서 외로움도 견뎌야 한다. 게다가 중간에 쉼을 갖고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앞만 보고 달리다 실패를 겪는 일도 많다. 우선멈춤의 여유를 모르는 무모함이다.
오늘이라는 궤도 위에 나를 얹는다. 인생길 위에서 다른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서서 기다리는 것이 아닌 그 멈춤의 순간을 내가 정하고 싶다. 여유 있게 사방을 둘러본 후 마음을 가다듬고 출발한다. 그리 멀지 않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놓인 것들을 눈으로 가슴으로 새긴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되돌아 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