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아님을
마음이 두려워진다. 지난 서너 달 동안 Dr.’s office를 꽤나 많이 드나들었다. 비교적 건강한 체질인 나는 정기적인 검사를 제외하고는 병원에 가는 일이 별로 없다. 단지 남들보다 일찍 찾아온 노안과 난시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검안의를 찾아 시력을 점검한다. 어쩌다 보니 이번엔 한 해를 거르고 검사를 받게 되었다. 닥터 강에게 22년 째 검진을 받아온 터라 내 눈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긴 시간 동안 여리기만 했던 닥터 강도 중년의 엄마가 되었고 그 세월 따라 내 눈은 시력도 낮아지고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에 이르렀다.
검사를 마치고 그녀는 내게 몇 가지를 경고했다. 갑자기 너무 높아진 안압과 약간의 시신경 손상을 지적했다.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말이 얼마큼 심각한 것이지 조차 몰랐다. 특수 안과 전문의 추천서를 받아들고 내려오는 계단이 휘어져 보였다. 아마도 검사를 위해 넣은 동공확대 약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 마음의 흔들림을 함께 느꼈다. 한 번도 내 몸의 한 부분에 장애가 생겨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잠깐 머릿속이 하얗게 된 듯했다.
인터넷에서 '안압' 이란 단어를 계속 검색하노라니 으레 '녹내장' 이라는 말이 따라 나온다. 안압이 높아지면 시신경이 손상되고 현대 의학으로도 한 번 망가진 시신경은 회복할 수 없어 결국엔 실명할 수도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 확률은 약 20% 라지만 내게 걸리면 100%인 셈이다.
안과 전문의 닥터 한은 자상한 의사다. 환자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서 자세히 설명한다. 불안과 겁먹은 마음으로 마주한 환자에게 안도감을 갖게 하고 신뢰를 끌어내는 좋은 기능의 소유자다. 검안의에게서 받았던 비슷한 검사를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 같았다. 난 두 눈을 온전히 맡긴 채 지시에만 따른다. 처방된 안약을 사용하고 일주일 후 안압을 낮추는 레이저 수술을 하게 되었다. 눈동자는 마취가 되어 움직이질 않는다. 내 몸이건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이번엔 왼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엄지발가락 안쪽으로 자라난 발톱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몸의 가장 낮은 곳이 나 전체를 아프게 한다. 몸의 어느 부분이 의식될 때, 그곳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들었다. 건강할 때는 신체의 각 기관이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이기에 특별한 부위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걷기에는 또 얼마나 불편하든지 평소에 깨닫지 못한 발에 대한 고마움을 되뇐다. 작은 발가락 하나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활동을 원활하게 연결해 주는 지극히 귀한 기능을 가진다.
발 전문의를 찾았다. 그렇게 많은 발 질병이 있음에 놀랐다. 뼈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들어오는 아가씨, 아예 휠체어에 앉아 가족의 도움으로 들어서는 이를 보니 나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의사는 지극히 간단한 처치로 된다며 나를 안심 시킨다. 잘못 자란 발톱을 뿌리까지 잘라내기 위해 마취주사를 놓는다. 수술 준비와 마취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는 연신 들락거린다. 잔뜩 겁먹은 내가 옆눈으로 보니 마치 공구같이 생긴 것들을 가지런히 놓고 있다.
감각이 없다. 시술하는 동안 내 몸이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의사는 마음대로 발을 다룬다.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피가 나는 것도, 상처가 생겨도 참아야 한다. 내 발을 남에게 맡겨놓은 채 꼼짝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렸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에 작은 딸의 이사를 도와 주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개 한 마리와 친구로 살고 있는데 웬 짐이 그리도 많을까. 여러 식구가 살아도, 혼자의 살림이라도, 갖추어야 할 것엔 큰 차이가 없나 보다. 정작 버리려 해도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고민인 듯하다.
소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끊임없이 공을 들이는가. 나보다 좋은 것 가진 이를 부러워하고 때론 시기하기도 한다. 능력으로 가질 수 없으면 힘으로라도 빼앗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다. 어차피 영원히 내 것인 것은 없는데. 하나도 없는데......
어찌 값진 물건뿐이랴, 심지어 자식들마저도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상처받는 일도 허다하다. 잠시 내가 맡아 있는 동안 그들로 인해 행복했으면 감사할 뿐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떠날 우리가 아닌가.
서서히 가벼워지는 마음을 느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정작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생각, 느낌, 사랑, 인내, 따뜻함 같은 형체를 갖지 않는 것들이 행동으로 드러날 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소유물들에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겠다. 너무 내 몸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몸치장에 집착하는 일도 그리 현명해 보이질 않는다. 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