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안개 내리는 길
워싱턴주 시애틀로 떠났다. 지난 두 번 길을 혼자 운전해 갔던 적이 있지만 이번엔 딸과 손자와 동행이다. 방학을 이용해 손자녀석이 미국의 50개 주를 차례로 밟을 수 있는 체험을 프로젝트로 정하고 다닌 곳이 제법 많아졌다. 지난 여름 텍사스주까지의 긴 여정 후 이번 겨울을 맞아 오레곤주와 워싱턴주를 돌아올 여행이다. 손자는 주 경계를 지날 때마다 새 땅에 들어서는 정복자가 된 듯 환호를 터뜨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와 아주 다른 풍광과 문화를 경험하지만 때론 색다른 법규가 있어 미리 알아두지 않으면 곤란을 겪을 때도 생긴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캘리포니아 해안과 나란한 101번을 택했다. 산호세에 사는 조카네에 들르기 위해서다. 내륙을 통해 가는 것보다 세 시간의 운전을 더 해야 하지만, 여행길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한결 즐거움을 더해준다. 해변은 모처럼의 비 소식에 구름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다. 청명한 날에 보는 바다와는 많이 달랐다. 차분한 여행길을 안내해 주려는 듯 내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는다. 새해를 맞은 이튿날에 떠나는 길 위에 난 무엇을 뿌려 놓을 수 있나.
일 주일 동안의 여행에서 가고 올 운전시간 만도 4일을 잡아야 한다. 시애틀에서 머물 시간이 딱 사흘 뿐이다. 딸과 교대로 운전하여 첫날엔 가능한 먼 곳까지 갔다. 오레곤과 워싱턴주 경계 부근에서 하루를 묵었다. 한참 북쪽까지 온 만큼 날씨도 제법 차다. 언제나처럼 여행길의 밤은 새로운 긴장감이다. 일상의 익숙함을 던지고 무언가 마주하는 기대의 설렘 탓이다. 시애틀에 사는 친구들의 정겨운 얼굴이 그려져 마음이 따뜻해 온다. 오레곤주를 따라 올라가는 해안은 정말 신비로웠다. 곳곳에 떠 있는 바위섬들이 나누는 얘기가 들려올 듯하여 조용히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워싱턴주는 울창한 숲으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주가 'Golden State' 라고 일컷듯 워싱턴주는 'Evergreen State' 를 자랑한다. 침엽수로 가득 메워진 산이 마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같다. 눈꽃이 휘날리는 산언덕을 조심, 또 조심 기어가듯 넘었다. 이런 기분을 언제 또 맛볼 수 있으리오. 마음속으로 나는 멀리, 아주 멀리 어릴 적 눈밭에 가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래서 더욱 소중한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눈발을 경험하기 어려운 손자는 신기함과 놀라움의 표정을 번갈아 지으며 연신 감탄이다. 운전대를 잡은 내 긴장감을 아는지. 산고개를 넘고나니 어깨쭉지가 단단히 뭉쳐있다.
시애틀에서의 꿈같은 사흘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친구로 평생을 사랑하는 친구, 고등학교 동기동창들과 보낸 시간은 왜 그리 짧은지. 모두가 곱게 나이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나 둘 남편과의 이별이 늘어가니 나처럼 외로움에 젖어드는 같은 마음이리라. 시애틀의 회색빛 날씨처럼 이젠 들뜨지 않은 삶의 길을 평안히 걸어가기를 빌어본다. 비내리는 거리와 젖은 커피향은 묘한 감성을 일으키는 이 도시의 또 다른 매력이다. 삶의 끝자락을 이곳에서 매듭짖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돌아오는 길은 단조로왔다. 내가 있어야할 곳, 해야할 일이 기다리는 일상으로의 복귀다. 내륙으로 통하는 5번 후리웨이를 따라 산을 넘었다. 남편 생전에 주말이면 무작정 길떠나기로 수없이 넘나들던 익숙한 산자락이다. 그동안 비가 내렸다지만, 다행히 마른 땅이어서 쉼없이 달릴 수 있었다. 열시간을 달려 캘리포니아에 들어섰다. 왠지 푸근해지는 기분, 아마도 고향땅에 닿았다는 안도감일지 모른다. 지나치는 자동차의 번호판이 내 것과 같은 모양인 것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다시 쉼을 위해 호텔에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새벽, 일찍 출발이다. 미국 서부를 여행하면 많은 산길을 만난다. 로키산맥을 따라 연결된 언덕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새벽의 산은 신비롭다. 좁고 굽은 길을 돌아서며 계곡 사이에 내려앉은 안개로 사방이 막혀 마치 나 혼자 떠있는 착각이 든다. 산안개는 높은 봉우리를 공중누각으로 세워놓고 땅아래의 세상을 외면하는 듯 하다. 정녕 내가 딛고있는 땅에서 무엇을 이루고 저 높은 봉우리까지 다달을 수 있는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이어질 그 길 위에 나도 서게 될 것이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이곳에도 꽤 비가 많이 내렸나 보다. 마른 풀잎들이 푸르게 살아났다. 집앞에 보이는 산봉우리 언저리에 큰 구름이 떠 다닌다. 산안개는 내일 새벽 햇빛이 흩어놓을 때까지 나를 지켜보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