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의

 

25년 한국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적이 있다. 어릴 부모님과 함께 해운대 바다에서 군용 고무 침대에 올라 앉았다가 균형을 잃고 속에 빠졌다. 익사직전 인공 호홉으로 정신든 이후로 번도 바닷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런 내게 하와이의 푸른 바닷물이 아무리 아름답게 느껴졌다 해도 결코 물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 만이 마음껏 하와이의 물맛을 즐겼던 여행이었다.

 

지난 봄, 우리 성당의 여러 신자들과 함께 멕시코의 여러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 왔다. 마지막 이틀은 요즈음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칸쿤을 들는다 하여 일행은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바다 보다는 산을 훨씬 좋아 하는 나는 그저 일정에 따라 참여할 뿐 별로 호기심이 없었다.

오후 늦은 시간, 어둠이 깔린 칸쿤은 웬지 친밀하게 다가왔고 해운대의 모래사장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끝없는 해안선을 달려가는 버스 창밖으로 내 시선은 꼼짝않고 굳어 있었다. 아, 전혀 때묻지 않은 천혜의 바다여... 호텔에 짐을 풀고 방 베란다에 앉아 룸 메이트와 밤 바다를 보며 새벽 세 시가 될 때까지 이어진 얘기로 졸린 줄을 몰랐다.

 

아침 늦잠 뒤에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칸쿤의 기이한 바닷물 색깔은 실로  태어나 처음 본 감격이었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다른 모습들의 관광객들은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져 태초의 평화로웠던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하였다. 도저히 멀리서만 바라볼 수 없어 바닷물 공포증 환자인 내가 파도치는 맑은 물에 손을 담그며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를 이 세상에 내어 주신 부모님, 사랑으로 만나 또 다른 나로써 삶의 여정을 함께 했던 남편. 아직은 그의 체취가 내 감각의 끝에 서려 있어 아득한 그리움이 파도따라 밀려왔다.

어느 시인은 ‘인간의 죽음이 이생의 시야에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과정이지만, 삶의 저편에서 보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환희’라고 표현했다. 저 먼 바다 너머엔 보고픈 사람들이 손짓할 것 같은 아련한 바람으로 이어졌다.

과연 우리 보다 먼저 지상의 삶을 마무리 하고 떠난 이들도 남겨진 나의 모습을 지켜 보려나.

바닷물의 향기에 취하며 마가렛따 한 잔을 홀짝홀짝 들이키노라니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아쉬움이 없었다.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의 신비가 눈앞에 서리고 그 광경이 끝날까 내 눈에, 내 마음에  흘리지 않고 담아두려 안간힘을 썼다. 낮동안 밀려왔던 검푸른 파도의 위용도 사라지고 분주했던 무리들도 간 곳이 없다.

내 삶을 노을처럼 채색하고 싶다. 차분하고 의미있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찬연한 희망과 생명을 전해줄 수 있도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지나간 날에 대한 감사, 견디어낼 수 있었던 만큼의 아픈 기억들, 어쩌면 남은 날들 앞에 놓인 두려움의 눈물일 수도 있겠다.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이 아름답게 죽기 위한 과정이라던가.

훗날 님과 마주할 찬란한 석양 빛에 영혼을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