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릇 하나
Goodwill의 진열대를 꼼꼼히 살핀다. 또 하나의 보물을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설레임이다. 집에 가는 길에 Salvation Army Store에도 들를 생각이다.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미사를 드릴 때 머리에 재를 받으며 이 말씀을 듣는다. 흙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자연의 시작이다. 만물이 그 위에 생존하고 퇴색되는 일은 영원히 반복된다. 굳이 아담과 하와의 창조신화가 아니더라도 흙에 대한 존엄성을 가져야 함에 시비를 거는 이는 결코 없을 것이다.
흙으로 빚어 만든 도자기에서 인생을 배운다. 미대 졸업과 함께 교사가 된 언니는 토요일 퇴근 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자기 가마를 찾았다. 주말 동안 굽기를 하고 월요일 새벽에 다시 출근하는 열의가 대단했다. 응용미술을 전공하고 여러 차례 국전에 입선한 작품도 도자기였다.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진흙이 오랜 작업을 통해 오묘한 빛깔과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놀라웠다. 언니는 자기의 혼이 담겨 이루어진 그릇들을 보석 다루듯 소중히 여겼다. 왠만해서 남에게 주는 일이 없었다. 완성된 작품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아서인지 시집가며 남겨놓은 도자기 몇 점은 부엌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얇고 편편한 것은 부침개 접시로, 오목하게 작은 것들은 양념종지로, 사발 만한 것은 김치보시기도 되었다. 시장에서 사온 매끈한 그릇보다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좋았다. 엄마에게는 시집간 맏딸을 보는 듯한 반가움도 있었을 테다. 도자기는 단지 그릇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을 담아내는 숭고한 우물처럼 내게 다가왔다. 과연 나는 어떠한 영혼의 모습을 가진 흙으로 빚어지는 삶인가.
하나 둘 모아온 도자기가 꽤 많아졌다. 틈틈히 굿윌이나 쌜베이션 아미 스토어에 들러 손으로 빚은 도자기들을 샀다. 때론 거라지 세일에서 찾기도 했다. 아주 적은 돈을 주고 귀한 보석을 받아든다. 운이 좋으면 하나씩 건지는 맛이 복권에 당첨되는 기쁨 만큼이다. 생각없이 내어놓은 습작일 수도 있지만 내겐 가슴 설레는 만남이다. 숙련된 도공들의 매끈한 솜씨와 달리 거의가 일그러지거나 어설픈 모양이다. 지구상에 하나 뿐인 작품이다. 취미로 세라믹을 공부한 사촌동생은 어렵게 만든 값진 주발 한 쌍을 이민길의 선물로 주었다. 나의 도자기 사랑을 알고 있었던 게다.
집안 여기저기에 흩어놓기가 어려워 정리할 가구를 마련했다. 스물 네 칸으로 구분된 나무 장식장을 놓고 비슷한 형태끼리 진열하였다. 윗칸 양쪽은 막내딸이 고등학교 세라믹 클래스에서 진흙으로 구워낸 인디언 장승이 자리잡고 있다. 큰딸이 대학시절 그리스 여행에서 사온 호리병은 제일 아랫칸 뒤로 밀어넣었다. 기계로 찍어낸 곱다란 선이 다른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엄마가 좋아할 거라며 선물로 준 딸아이에게 미안하다.
우리집 생활용품은 온통 도자기다. 칫솔과 치약을 담는 그릇, 양치하는 컵, 꽃병과 화분받침, 연필꽂이는 물론, 과일그릇과 팝콘을 담을 때도 도자기를 사용한다. 하다못해 파뿌리를 잘라 심은 질그릇도 부엌 싱크 선반에서 나와 눈맞추고 앉아있다. 가볍고 모양이 쉽게 변하는 플라스틱보다 무거우면서 우직스러운 흙의 고집이 맘에 든다.
도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얼굴들, 행복에 겨워 웃음을 머금기도 하지만 어떤 것에서는 왠지 처절한 쓸쓸함이 보이기도 한다. 일그러진 표정도 있다. 무어라 애원하는 눈길도 느껴진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가 있다. 그가 영화 '사랑과 영혼'속에서 데비 무어를 등 뒤에서 감아안고 도자기 물레를 돌리던 장면이 눈앞에 서린다. 흙과 물이 엉기어 치대지고 하나의 창조물로 거듭나기까지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나를 그 안에 던져야 한다. 나와 하나가 되는 것. 알 수 없는 이의 손으로 만들어진 저 그릇은 어떤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도자기는 지금 어느 과정을 지나고 있는가. 모양은 굳어졌는지, 도안과 염료는 결정되었나, 애벌구이는 끝난 건가, 혹시 초벌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간 것은 아닐까. 내 삶이 완성되는 날 과연 어떤 모습의 도자기로 새겨 지려나. 두려움과 함께 등골 위로 감전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누군가 흙 속에 감추어진 내 광채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명이 담길 수만 있다면 아주 작은 그릇이라도 행복하겠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한다면 더욱 가슴 설레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