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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롯불과 인두                                                      

 

   삭풍이 세차게 불어오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면서 눈보라가 나부끼는 겨울철엔 어머니는 두문불출하시고 따끈한 아랫목에 앉으셔서 한복을 지어셨다. 벌겋게 달구어진 화롯불과 인두가 바늘에 실가 듯 정답게 언제나 같이 놓여 있었다. 장인의 손에 쥐어진 인두는 저고리의 섶과 깃과 소매를 도장 찍듯 눌러 선을 예쁘게 만드셨다. 인두를 적당히 달구어야 옷이 타지 않고 장인의 손에서 멋지게 옷이 뽑아진다.      

   남편은 직장에 나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 후 아무도 없는 텅빈 집 안방에 앉으셔서 남편과 자식 사랑 일념으로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배기도록 바느질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 손가락 마디를 보노라면 소나무의 공이가 생각났다.      

   겨울철에 장작으로 군불을 땔 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시면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타올랐다. 어머니 사랑이 장작불과 달구어져 온돌방은 여느 방보다 더욱 따끈따끈했다. 타다 남은 장작 불덩어리를 놋화로에 넣어 방에다 갖다 놓으셨다. 벌겋게 달아오른 화롯불처럼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추위가 싹 가시고 방은 후끈후끈 열기가 더해 갔다.     

   추운 겨울 화롯불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구마나 감자나 밤 등을 구워 먹는 화덕과도 같았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손을 비비며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가족 사랑이 꽃을 피웠다. 명절날 긴긴 겨울밤엔 윷놀이도 하고 화투도 치며 화롯불 가에서 가족 사랑이 무르익어 갔다.       

   옷이 매끈하게 잘 빠져나오려면 인두질을 잘해야 곡선이 아름다운 한복이 만들어진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지, 적삼과 두루마기와 어머니의 치마, 저고리, 쳐내, 두루마기, 딸들의 색동저고리, 치마 등 정성스레 만드셨다. 하얀 동정을 인두로 곱게 눌러 깃 위에 부치면 얼마나 깨끗하고 정갈하게 보이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음력 설날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으시고 자녀들로부터 세배를 받으시고 세뱃돈을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온 가족이 어머니가 만드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설날 상에 둘러앉아 끓여주신 떡국을 맛있게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귀가하시면 어머니는 정성스레 언제나 화롯불을 지펴 놓으셨다. 장작을 못 때시면 검정 숯을 사시다가 파란 불꽃을 내는 일산화탄소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셨다가 벌게진 숯덩이만 화로에 담아 두신다. 뜨거운 잿더미 속엔 언제나 고구마나 감자가 묻혀 있었다. 식사 후 간식으로 먹으려고 어머니는 늘 그렇게 하셨다. 무청 말린 시래기를 콩가루에 묻혀 된장을 풀고 국을 끓였다. 정말 얼마나 구수한지 추위에 오그라든 몸이 살며시 녹으면서 하루의 피로가 싹 풀렸다. 겨울철에 모자라는 단백질이 콩가루와 된장에서 섭취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놋 화롯불은 추운 겨울 집안의 생기를 돌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처럼 난로도 없었고 물론 가스나 전기난방 시설도 없을 때 유일무이한 난방 도구로 사용되었다. 화롯불 옆에 앉으셔서 달구어진 인두를 사용하시면서 한복을 만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나라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요즈음 가정주부들이 집에서 한복을 만드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다. 한복 전문집에 한복을 맞추든지 아니면 기성복을 사던지 하므로 집안에서 인두도 참 보기 드물다. 어머니 시대에 살던 가정주부들은 참 많은 고생을 했다. 전기다리미나, 냉장고, TV, 세탁기 등 문명의 이기가 전혀 없어서 일일이 손으로 모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요즈음 주부들은 최고수준 가전제품 덕택에 참 편하고 많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자기 계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좋은 점도 있지만, 가족 각자가 자기 시간에 열중하다 보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서 서로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가족 구성원 상호 간의 대화 부족으로 소통이 잘 안 되어 자녀가 문제아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 군고구마나 군밤을 드시면서 나를 아버지 무릎에 앉히곤 하셨다. 문인 방 위에 손수 붓글씨를 써셔서 벽에 붙여둔 한문을 읽으시면서 뜻을 풀이해 주셨다. ‘백인 삼사(百忍 三思)’라고 발음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적어도 모든 일에 백번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세번은 생각해야 한다.’라고 뜻을 설명해 주셨다. 종종 중국 시인들의 시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시는 주희의 권학가 였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經)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初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한순간이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며  연못가에 핀 봄풀이 아직 꿈도 깨기 전 계단 앞의 오동나무 잎이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라 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이렇게 자상하셨던 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와중에 돌아가셨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온 가족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민족의 비극이 가정의 비극으로 비화할 줄 누가 꿈엔들 알았겠는가. 나는 아버지 없이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가르쳐 주시던 중국 송나라의 시인 주희의 권학가가 생각났다. 그 시를 낭송하면 그래도 위로가 되어 나의 멘토가 되어 주셨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쉽게 슬픔에서 나를 추스를 수 있어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화롯불은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정성스레 만드시던 한복도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화롯불에 꽂아 둔 인두도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몹시 슬펐다. 아버지를 여윈 것도 슬퍼 죽겠는데 어머니마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시고 그렇게도 정성을 쏟던 한복 만들기도 줄어들기 시작하셨다. 집안 분위기가 썰렁하면서 어머니의 슬픔을 어린 나로서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를 몰랐다.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다가 하루는 용기를 내어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슬퍼만 하시면 어머니가 병나시겠어요.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가시면 어린 저희는 고아가 될 수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천국에서 만난다고 생각하시고 한복을 계속 만들어 보세요. 옛날 정성 그대로 지은 한복을 천국에 가져간다고 생각하시고요.’ 어머니는 내 말을 귀담아들으시다가 ‘맞아, 너 말이 옳아. 옛날대로 계속 아버지 한복을 만드는 것이야. 살아계실 때 정성을 쏟던 그 정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야. 그길 만이 내가 살고 너희도 사는 길이야.’ 어머니는 사랑채 대신 안방에다 장작으로 군불을 지피시고 다 타다 남은 불덩이를 놋 화로에 담아 인두를 꽂기 시작했다. 방은 다시 훈기를 찾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아버지 한복 만들기를 시작하면서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다시 바느질하시는 모습을 보자 우리 집은 훈훈한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향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채워져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생기를 되찾자 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잊을 수가 있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단란하게 잘 지낼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오 남매를 모두 대학 보내시고 자녀의 효도를 받으시며 여생을 편안하게 사실 수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 장롱 속에 그동안 만들어 놓으신 아버지 한복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면서 정성스레 만들어 놓으신 아버지 한복을 어머니 관 속에 넣어 드렸다. 온 가족이 어머니의 일편단심 남편 사랑에 눈시울을 적셨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의 놋 화롯불이 생각나고 그 불에 꽂아 둔 인두로 지극정성 남편의 한복을 만드시던 어머니의 넋을 기리게 된다. /추억의 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