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아내

딸의 결혼식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빠가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허리통증이 재발한 것이다.
성당 성가단장을 맡아 봉사하는 시몬 형제님은 남편의 대학 후배이다. 노래를 빼어나게 잘할 아니라 컴퓨터를 비롯한 어떤 종류의 기계를 막론하고 문제 해결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성격 또한 친절이 배어 있어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다른 이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기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최근 동안 그가 경영하는 드라이 크리너의 기계들이 돌아가며 말썽을 피운 모양이다. 하루라도 기계를 멈출 없어 손수 고치느라 무리를 같다. 척추디스크 환자에게 가장 조심할 중의 하나가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아야 한다는데 결국 심한 통증으로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통을 줄여주어야 것이 먼저라서 통증클리닉엘 가야 했다. 아내는 딸의 결혼식 준비점검으로 해야 할 일이 밀려있다. 마침 바쁜 일이 없는 날이기에 내가 돕기로 했다.
진통주사를 맞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전에도 똑같은 형태의 진료를 받은 일이 있어 이번에도 통증 완화에 도움이 치료를 기대했지만, 의사의 말은 달랐다. 환자의 상태가 지난번과는 다른 위치의 디스크일 가능성을 진단했다. MRI 촬영을 통해 확인한 후에라야 주사를 있다는 말이었다. 서둘러 의료 촬영소의 예약을 시도했지만,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큰일이다. 닷새 후면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해야 신부의 아빠가 아닌가. 이곳저곳 전화로 끈질기게 사정을 하여 겨우 병원에서 날의 마지막 차례인 오후645분으로 예약을 받아냈다. 하지만 시간에 맞춰 촬영한다 치더라도 통증 치료 의사의 진료시간이 끝날 아니라 다음 날엔 아예 병원이 쉬는 날이란다. 갈수록 태산이다. 환자는 아픔을 견디느라 어쩔 모른다. 앉았다가 일어서는 일이 제일 어렵다며 구부정하게 있는 자세가 가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무조건 의료 촬영소로 갔다. 환자 대기실에는 의자 하나 없이 복잡하기가 이를 없었다. 겨우 접수창구에 이르러 떼쓰기 작전에 돌입했다. 이보다 더한 위급상황이 있을까. 어떻게 해서라도 오늘 진통주사를 맞고 돌아가야만 하루 이틀 회복하여 걸을 있을텐데직원은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아주 정중하게, 불쌍한 표정마저 지으며 매달렸다. 이번 주말에 딸을 결혼시킬 아빠임을 거듭 강조했다.
창구의 아가씨는 오후에 다시 보라는 외에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겠다는 말로 간절함을 대신 전했다.
시간 쯤이 지났을까. 직원이 나를 부른다. 단걸음에 창구로 갔다. 마침 예약취소 환자가 있는 같으니 계속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촬영실 안쪽으로 옮기도록 안내해 주었다. 조금씩 희망이 보인다. 무언가 진실로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는 통하는 일이렷다. 형제님의 손을 잡아 부축하여 의자 뒤를 쿠션으로 돋아놓고 걸터앉을 있도록 했다. 얼마나 괴로울까.

문득 오래전 남편의 손을 잡아 부축하여 병원에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 핏기없는 얼굴에 촛점 흐린 눈동자로 굳게 닫은 입술 안에서 힘주어 이빨을 깨물던 모습. 그것은 이길 없는 어떤 힘에 대한 침묵의 항의처럼 보였다. 항암치료를 위해 침대로 옮겨지며 마주친 눈빛은 가장 약한 인간이 자신을 통째로 의탁하는  꾸밈없는 절규였다. 그런 날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어느 끝 길에 다달아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어쩌면 차라리 자유로울 있는 무엇에 자신을 맡기는 때에 이르렀다. 더는 고통 없는 곳에서 영면하기를.

끝을 수 없는 기다림은 정말 힘들다. 아주 작은 희망을 붙잡고 배고픔도 삭이며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다시 나를 부른다. 곁에서 형제님은 부인이 아니라며 소리를 친다. 내가 곤란해 할까 봐서라나. 무슨 상관인가, 나를 부인이라 불러도 좋아, 빨리 촬영실에만 넣어준다면. 신난다. 이번엔 틈새에 촬영할 순서로 넣어준다네. 오후240. 무려 다섯 시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차례다. 무조건 감사하다. 서둘러 촬영CD 받아가면 오늘 중에 진통 주사를 맞을 있겠다.

약의 힘은 대단하다. 의사의 말대로 전과 다른 위치에서 디스크가 파열된 어마어마한 통증이란다. 얼마 주사를 맞고 나오는 형제님이 다른 사람 같았다. 뚜벅뚜벅 잘도 걸어 나오네. 물리치료사의 설명을 듣고 스트레칭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 배고프다. 끼를 한데 모아 형제님과 가짜부인이 정신없이 먹었다. 하루의 모든 과정을 감사하며.
이틀 후에 주사를 맞으면 딸의 결혼식을 마칠 때까지 끄떡없을 것이다.

남편이 떠나기 전까지 나도 남자의 아내였다. 오늘 형제님에게 내어드린 작은 정성이 아픔을 덜어줄 있는 귀한 결과를 낳았으니 나도 행복하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아내라는 , 부인이라는 호칭을 떠올리며 가만히 남편을 불러본다. 금방 '여보'라는 목소리가 들려올 같다.
오늘 하루 시몬 형제님의 일일 아내의 몫을 잘해낸 내가 신통하다.
'
아내'라는 ,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