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2016년 그린에세이 등단작품)

 

 

붉으죽죽한 비로도 커튼이 에어컨 바람에 펄럭인다.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힘든 벽걸이 에어컨, 골드스타 상표이다. 금성, 메이드인 코리아를 다른 곳에서 보았으면 반가웠겠지만 딸이 두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맨해튼 변두리 아파트 벽에 걸린 그것은 낡고 초라하기만 하다.

 

가구라고는 바닥에 세 개의 서랍이 달린 일인용 침대와 책상이 전부이지만, 내가 가져간 두 개의 트렁크를 들여놓으니 간신히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자리만 남는다. 행거에 걸려있는 옷가지와 구두박스위에 위태롭게 올려놓은 전신 거울로 방의 주인이 여자라는 걸 간신히 짐작할 수 있다. 또래 여자아이 방에서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함이나 화사함은 없다. 집에서 멀지않은 기차역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와 곧 수명을 다할 듯 숨찬 에어컨 소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방 두개에 화장실 하나인 아파트를 세 명이 쓴다. 거실까지 커튼으로 가리고 방으로 사용하여 한낮에도 복도의 불을 켜야 사물을 식별할 수 있다. 시트콤 <프렌즈>를 보고 막연히 상상했던 뉴욕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6개월 만에 본 딸아이는 대범하고 씩씩하다. “뉴욕은 많이 이렇게들 살아.” 엉거주춤 서있는 내게 말하며 트렁크를 클로젯에 치운다.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계단 몇 개만 올라오면 되는 1충이고, 한 블록만 걸어가면 바로 빨래하는 곳이 있으니 운이 좋았단다. 종점이라 퇴근할 때 졸면서 와도 내릴 곳을 지나칠 염려 없고, 방세에 전기료가 포함돼 있어 무덥고 끈끈한 뉴욕의 여름에 에어컨을 마음껏 틀을 수 있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란다.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이 집의 목욕탕 천장은 습기로 군데군데 칠이 떨어져 나가고 시커먼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집을 구할 때 보았던 인터넷 사진에서는 샤워 커튼에 가려져 안 보이던 부분이다. “셋이 쓰려면 붐비지 않아?” “ 나가는 시간이 다 틀려서 괜찮아.” 어려서부터 인내심 하나는 끝내주더니 역시 잘 참는다.

 

냉동 칸을 여니 정체모를 검은 봉투가 바닥에 떨어진다. 70년대도 아닌데 성에가 많이 끼어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LA에서 가져간 반찬으로 룸메이트를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집밥 오랜만이에요. 침대 좁을 텐데, 제가 따님이랑 같이 잘 터이니 어머니 혼자 편히 주무세요.” 부산에서 왔다는 아가씨의 애교 있는 사투리와 붙임성이 정겹다.

 

지금의 딸아이 나이였을 때 엄마가 해주는 밥 편히 먹고 다니면서도 늦잠을 자서 걸핏하면 택시타고 출근하기 일쑤였지. 사무실근처 명동의 백화점에서 옷이나 가방 따위를 신용카드 할부로 사들이곤 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계약직이어서 생활이 빠듯할 것이다. 더구나 살인적 물가라는 뉴욕에서 부모에게 손 한번 안 벌린다. 맨해튼 중심부 직장까지 거의 두 시간을 출퇴근에 빼앗기며 꿋꿋하게 객지 생활하는 아이가 기특하고 안쓰러워 눈물이 핑 돈다.

 

“가능하면 짐 안 늘리려고. 여기서 오래 안 살 거야.” 더 나은 직장으로 곧 옮기겠단 말인가. 제발 그리 되기를 빌어본다. 다음날 아이가 출근한 후 코인라운더리에 들러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놓고 동네가게에서 주꾸미와 호박, 양파, 딸기를 샀다. 차가 없으니 이것저것 많이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싶은데 세탁물도 찾아 걸어서 가야하니 그럴 수가 없다.

 

잡초하나 자라지 않는 척박한 모래땅이나 물이 고이지 않는 산비탈에 심은 포도나무가 더 당도 높은 포도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지금 고생을 사서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믿으며 조바심 내지 말아야겠다. 삶은 어차피 혼자 걷는 길, 걷다가 넘어지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묵묵히 걸어야 하니까.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는 없으니까.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마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쟝 루슬로의 시-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 일부

 

아이가 어려서 빠릿빠릿하지 못하다며 달팽이라고 놀리곤 했었는데, 우연히 읽은 시의 한 구절이 딸에게 다녀온 후 심난해진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