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다듬이 소리
다듬이 소리는 우리나라 정서가 듬뿍 서린 옛 여성문화의 유산으로 이어져 왔다.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여성들의 일상생활 애환이 표출되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다듬이 소리하면 나는 어머니와 육촌 올케언니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두 분을 통해 다듬이 소리와 친숙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다듬이 소리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향수를 느끼게 한다. 어머니 품같이 그리워지는 소리다.
내가 어릴 때 보고 들은 어머니 다듬이 소리와 육촌 올케언니 다듬이 소리는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까만 머리를 빗어 올리고 비녀를 꽂은 다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정하게 앉아서 다듬이질했다. 그 모습은 아름다운 한편의 인물화를 감상하는 듯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듬이질하는 어머니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어머니의 다듬이질 삼매경에 몰입하는 모습에서 한국 여성 특유의 정절과 모성애를 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남편과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는 얼이 한곳에 모여 승화하는 모습이 다듬이질하는 모습과 소리에서 어우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 다음이 질 할 때도 있었지만, 종종 며느리와 마주 앉아 함께 경쟁이라도 하듯 번갈아 다듬이 두드리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고부간의 정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고부간의 갈등이 다 해소되고 사랑으로 화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많이 오래 두드릴수록 이불 홑청이나 삼베옷이나 모시옷이 빳빳해지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풀을 세게 매겨 다듬이로 두드려진 이불 홑청은 살갗에 닿지 않고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촉감이 정말 좋고 덮고 잠잘 때 몸에 칙칙 감기지 않아서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얼마나 풀을 많이 매기고 다듬이질을 잘 했는지 이불을 만질 때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 당시에는 에어컨도 없고 전기 선풍기도 없을 때라 고작 손부채가 전부였다. 이렇게 어머니의 정성이 스며든 다듬이질한 옷이나 이불 홑청은 가족들 간에 인기가 대단해서 어머니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곤 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 고향으로 놀러 가곤 했다. 시골 여름 풍경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내 마음에 그리 져 있다. 특히 수박을 밭에서 따다가 새끼줄에 메어 깊은 우물물에 띄워 차게 해서 먹던 일이 잊히지 않는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우물이 유일무이한 냉장고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중에도 밤이 되면 다듬이 소리가 온 시골 마을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간혹 삽살개 짖는 소리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한 밤에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나에겐 환상의 소리였다.
모기 때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잠을 청해 보지만 엎치락덮치락 하기가 일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귀에 익숙한 다듬이 소리가 들리면 단잠에 빠지게 하는 수면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 다듬이 소리가 자장가로 늘 들렸기 때문에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쉽사리 잠들 수 있었다..
하루는 달 밝은 밤이었다. 어릴 때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달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안이 아니고 시골 마당에서 멍석을 깔아놓고 반듯하게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달밤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날 밤 유난히 달 밝은 밤이었는데 늦게까지 다듬이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다듬이 소리를 내며 다듬이 질을 하고 있을까 몹시 궁금하여 잠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보니 육촌 올케언니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호기심에 육촌 올케언니 다듬이 질 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나의 어머니가 최고로 다듬이 질 잘 하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육촌 올케언니가 어머니처럼 다듬이 질을 잘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육촌 올케언니는 우리 가문으로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육촌 오빠가 징집되어 군대에 입대하자 온 집안은 그의 생사를 걱정하며 전쟁에서 이겨 무사히 귀환하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전사 통지가 날라왔다. 날벼락 같은 비보에 온 일가친척들은 슬픔에 잠겨 넋을 잃고 있었다. 육촌 오빠와 올케언니는 외모가 둘 다 출중하게 뛰어났고 부부가 금실이 좋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올케언니는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고통을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더 열심히 일했다.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시동생들을 잘 키우며 뒷바라지를 잘해내었다. 가족이 대가족이라 많은 빨래를 해서 풀을 한 다음 다듬잇돌에다 얹어놓고 다듬잇방망이로 밤늦도록 다듬이질하는 소리를 나는 이 달밤에 듣게 되었다. 자정이 넘도록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타고 나의 귓전을 두드렸다.
고요한 밤중 가끔 삽살개가 짖어대고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외는 고요한 정적만이 시골 마을에 흐르고 있었는데 장단 맞춘 다듬이 소리는 나에겐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로 들려왔다. 나는 어머니 다듬이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다듬이 소리를 이날 밤 처음 듣게 되었다. 짚신을 신고 살금살금 육촌 올케언니 집을 찾아가 다듬이 소리가 나는 방앞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호롱 등잔불을 켜놓고 다듬이 질하는 모습이 그림자처럼 창호지 문살에 그대로 윤곽을 드러내면서 방망이 두 개가 번갈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장단 맞추며 몸이 움직이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머리를 곱게 빗어내려 따아 올리고 비녀를 길게 꽂은 모습도 실루엣으로 나타나는데 정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다듬이 소리는 애틋한 사랑을 읊는 노랫가락이었다. 이제는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여인의 한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애틋한 사랑을 읊는 노랫가락으로 들려왔다. 그녀는 한을 다듬이 소리에다 싣고 풀고 풀어도 풀지 못하는 슬픈 사랑 노래를 엮어 하늘에다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다듬이 두드리는 소리는 여느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와는 판이하였다. 구성진 노랫가락이 한을 퍼 올리면서 애절하게 애처롭게 흐느끼듯 속삭이듯 처절하게 나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자식도 없이 한평생 수절하며 살아가는 올케언니를 바라볼 때마다 이마에 패인 주름살은 아픈 세월의 흔적이었고 그녀의 인생은 어쩜 한 편의 드라마 같아 보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달밤의 달은 변하지 않고 온 누리를 비취고 있지만, 그녀의 한 맺힌 다듬이 소리는 문명의 이기와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아직도 그 다듬이 소리는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메아리 되어 종소리처럼 멀리멀리 퍼져 나간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살아 있는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사랑의 찬가라고 한다면 올케언니의 다듬이 소리는 남편을 여읜 슬픔의 한이 어우러진 눈물의 만가(輓歌)였다.
* 2011년 3월 28일 미주중앙일보 문예마당에 게재/추억의 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