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판타지아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고유 민요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애창곡이다. 하지만 내가 낯설고물 선 이곳에 와서 아리랑 민요를 목청을 돋우어 힘껏 불렀다가 위기를 모면한 사건이 있었다. ‘위기가 기회가 된다.’란 말이 나에게 이루어진 놀라운 사실,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리랑’ 민요였다.
미국에 이민 온 지도 올해 34년이 되었지만, 이곳에 와서 다시 뿌리를 내리면서 잘 살아가기가 처음에는 적응이 잘되지 않아서 참 힘이 들었다. 언어, 문화, 자라온 환경이 달라 적응을 못 해 역이민 가는 가정이 종종있는 사실을 신문 지상을 통해서 알았을 때 역이민 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민 오자마자 얼마 안 되어 좋은 직장을 갖게 되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인종전 시장 같았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다. 직장 가는 것이 즐겁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서로 협력하며 능률적으로 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일하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쳐 주치의가 무리한 일을 하면 안 되고 가벼운 일을 해야 한다는의사 진단서를 써 주었다. 나의 상관이 진단서를 보더니 아주 가벼운 일만 하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필리핀 독신 동료가 내가 할 일까지 자기가 다 맡아서 해야 한다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나를 험담하기 시작했고 상관에게도 내가 일하기 싫어 꾀병한다며 고자질을 해 나를 골탕 먹이고 있던 어느 날 하루였다. 직장 안에 있는 광고판에 나의 이목을 끄는 광고가 큼직하게 나붙어 있었다.
“다민족 문화 잔치(Ethnic Diversified Culture Festival)를 1982년 5월 4일 개최하니 자기 나라의 고유문화를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서로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상호협력과 상호공존의 번영을 누리어 직장 분위기를 화해와 화평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음”
‘문화잔치’라 나에겐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나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로의문화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달라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겨 분쟁이 일어날 때가 종종 있었다. 직장 당국에서는 중재자를 내세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실패할 때가 있었다. 일의 능률을 올리고 효과적으로 하루의 일과를 잘 처리하려면 일터의 분위기가 좋아야 하므로 직장 당국에서 개발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나에겐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출구가 어쩌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이 기회에 조국의 문화를 알릴 절호의 기회란 생각이 들어서 한번 참여하고 싶은 생각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막상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무슨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한국문화를 알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나는 아리랑 민요와 함께 한국 춤을 보여줌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아리랑 민요곡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선정등재된 바가 있다. 아리랑 민요는 우리나라 서민의 고유한 정서와 애환을 그린 민요로서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지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라 내가 연습만 하면 얼마든지 대중 앞에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만 부르기에는 너무 밋밋해서 노래와 함께 한복을 입고 춤도 곁들여 추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지만한 번도 춤을 배운 적도 없고 대중 앞에서 추워 본 적이 없는 내가 가능한 일일까 하고 걱정이 앞섰다. 나는전문 춤꾼처럼 춤을 못 추어도 아리랑 노래에 장단 맞추어 자연스레 그냥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기로 마음먹고 직장 갔다 와서 노래연습에 몰두했다. 원래 음치였던 내가 ‘문화잔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기적과도같은 결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 분위기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자 궁여지책으로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함께 일하는 필리핀 독신 남성이 나에게 괜히 시비를 걸어 내가 자기를 ‘인종차별’ 한다고 직장 당국에 고발해 놓고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인종차별 한 사실이 없으니 무죄를 밝히겠지만, 판결이 끝날 때까지 불려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이 ‘문화잔치’가 서로의 갈등을 해결하고 이해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참여함으로 필리핀 남자와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가 솟아났다.
관객이 한국 사람들이면 내 춤추는 모습을 보고 엉터리 춤이란 것을 알고 포복 절도를 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모두 외국사람 앞에서 추는 한국 춤이라 잘 못 추어도 잘 추는 줄 알고 박수를 보낼 것이기에 별로 걱정은 되지가 않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값이면 잘 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연습은 계속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초청을 하지 않고 가족들만 초청했다. 십여 개국이 넘는 다민족 문화를 감상할 기회였지만 다른 사람 공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가슴만 뛰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모두가 직장 동료들이고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다행하게도 우리 가족뿐이었다. 자녀에게 내가 아리랑 민요와 한국 춤을 춘다고 하니 자녀마저 호응을 안 해주고 농담으로 여기니 과히 내 노래 솜씨와 춤솜씨가 어떠하다는 것이 짐작이 갔다. 믿건 말건 멍석은 깔렸으니 내 차례가 오면 한바탕 그동안 닦아온 기량을 마음껏펼쳐 보리라고 다짐했다.
드디어 내 공연 차례가 오자 두 근 반 서 근 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무대 위로 올라가서 이름과 출생 국을 밝히고 아리랑 민요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하고 곁들여 한국 춤도 춘다고 인사를 했다. 얼마나 긴장을했는지 노래도 연습한 것만큼 나오지도 않고 춤도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버려 유연한 춤을 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앙코르를 부르며 박수갈채가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외의 반응에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망신을 한 줄 알고 나 자신에 실망하고 있었는데…….주저하고 있으니까 나중엔기립 박수갈채가 쏟아지면서 앙코르를 계속 불렀다. 나는 갑자기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번엔 정말 잘 불러보리라 생각하고 떨지 않고 침착하게 또 한 번 불렀더니 장내가 터지라 손뼉을 쳤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만 연발하면서 인사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며칠 휴가를 내어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직장에 나갔을 때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나를 괴롭히던 필리핀 남자가 찾아와서 깍듯이 악수를청하면서 수고했다고 칭찬했다. 아리랑 민요곡조가 매우 아름다워 자기 조국이 생각났다며 아리랑 민요를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나를 괴롭혀서 죄송하다며 ‘인종차별’ 고발한 건은 다 취소할 테니 앞으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며 환하게 밝은 웃음을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긴장이 확 풀리고 직장 동료와 잘 어울려 일할 수 있었고다소나마 한국을 알릴 수 있어서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휴식 시간마다 휴게실에서는 한국의 아리랑 민요 노랫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왔다. 배우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늘어나면서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날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 병난다….’
나의 이민 초기의 드라마는 ‘아리랑 판타지아’로 클라이맥스의 팡파르를 울리며 막을 내렸다./미주문학 문학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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