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유감

 

내게 머리를 기른다는 일은 고역이다.늘 짧은 모양에 길들여진 나는 머리가 조금만 자라면 견디지 못하고 미용실을 찾는다. 단정한 머리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3주에 한 번은 단골 미용사에게 가야 한다.

애초부터 이런 남자 머리스타일에 익숙한 것도 알고 보면 내 탓이 아니다. 딸만 넷 중 막내인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내머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돌 무렵에 찍은 구겨진 흑백사진엔 영락없는 사내아이가 찡그리고 서 있다. 외삼촌 결혼사진 속에선 세 살짜리 귀여운 양복차림의 꼬마 신사가 되어 있다. 

10남매의 맏이에게로 시집 온 엄마는 내리 세 딸을 낳고 나를 잉태했다. 내가 뱃속에 있었던 열 달동안 초조감에 떨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그 시절까지도 한국사회는 대를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한다는 것이 맏며느리로서 상당한 부담을 넘어 쫓겨날 각오 마저도 해야할 때였다.
종가의 맏아들과 결혼한 나도 딸만 둘을 낳았지만 떳떳 당당한데 말이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더란다. 장손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집안은 물론 온 동네의 이목집중, 관심폭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미리 태아의 성별을 알아볼 수 없었으니 얼마나 궁금하였겠는가. 서른 일곱의 늦은 출산이어서인지 산파가 불려오고 꽤나 엄마를 괴롭힌 후에 내가 나온 모양이다. 다섯 살 위의 언니는 대문 문지방에 쪼그리고 앉아 오가는 동네 사람들의 질문에 어른들이 시킨대로 아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아들이라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읊고 있었단다. 또 계집아이가 나왔다는 말에 방금 전까지 진통에 몸부림치던 산모는 산고보다 더한 아픔 속에서 넋이 나갔더란다. 이후로 학교에 갈 무렵까지 나는 우리 집의 장손으로 자라났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미모와는 상관이 없는 여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갈 때에 이르러서야 나의 올바른 성을 찾게 되었지만 그 때까지도 아들에 대한 미련이 있었는지 내 머리는 남자아이들의 상고머리를 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단골 이발소는 돈암동 전차종점 근처에 있었다. 나는 늘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높은 의자 팔걸이 양편에 빨래판을 걸쳐놓아 나를 앉히고 바리깡으로 다듬은 뒤 목덜미는 손잡이 면도칼로 잔머리들을 밀곤 했다. 이발소를 갈 때마다 입구 기둥에 긴 가죽끈 하나가 매달려 있었는데 이발사는 가끔씩 면도날을 거기다 쓱쓱 문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겁먹어 감히 남자 머리가 싫다는 말을 내뱉을 용기를 갖지 못했다. 차츰 여학생이 되어가며 자연히 나는 긴 머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 고등학교 때에도 두 갈래 머리를 땋고 다녔다. 짧은 머리에 한이 맺혔나, 대학 입학 때 숏컽을 하고 자른 머리로는 부분 가발을 만들어 종종 변신에 사용하였다. 그 후로 짧은 커트머리는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요즘 미장원 갈 시간은 내지 못해 조금 길어졌는데 손자녀석이 할머니 머리가 크레이지란다.

지금도 내 머리는 짧다. 남자 머리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긴 머리를 보기좋게 가꾸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내가 이조시대 쯤 태어났더라면 어떤 머리일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숱도 없는 긴 머리를 정성껏 땋아 쪽을 지어 비녀를 꽂으셨다. 평생토록 머리를 자른 일이 한 번도 없으셨다니 할머니 나이 만큼 오래된 머리카락이 있다는 말인가. 머리 감고 말린 다음 툭툭 털면 모양이 잡히는 이 간단한 세월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젠 머리할 순서를 기다리며 불평하지 말 일이다.

남자같이 보이면 어떤가. 어차피 남녀 성별의 차이도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이 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