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빛 영혼

유숙자

산다는 것은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게 되어 있으나 내게 심각하게 다가오기 전에는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야 할 연수를 모르기에 하루하루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앞날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장수할 사람이나 단명한 사람이나 그 삶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모르기에 편안하게 살고 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편이나 죽지 않을 만큼 앓고 있는 지병이 있다. 첫아이 출산 후유증으로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본래 나의 주치의는 부인과만 취급하여 산과의 분만은 다른 종합병원에서 행해졌다. 출산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어 6주 만에 주치의를 찾아갔다. 나의 주치의는 출산 시 체내에서 완전히 제거되었어야 할 불순물이 남아 있다며 당장 수술을 권했다. 아기집이 수축하여 있지 않은 상태라 마취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힘들었던 수술은 단지 내 몸에서 불순물을 제거했을 뿐, 출산 후 아픈 허리와는 상관이 없었다. 정형외과에서 X Ray를 수없이 찍었으나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진통제를 주었고 복용할 때뿐이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둘째 아기 낳고 산후 조리를 잘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희망을 품고 두 번째 아기를 갖고 서울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하는 J 병원 N 박사의 정기 진료를 받았다.

 

둘째 아기는 겸자분만으로 태어났다. 첫아이 때와 달리 3주 동안 병원에 머물며 산후조리를 잘하고 퇴원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어른들 말씀대로 한 달 이상 꼼짝 않고 누워서 조리했으나 통증은 여전했다. 그때부터 시련과 고통 속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르내렸다.

 

젊어서 운동을 해서인지 통증과 상관없이 내 몸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아주 심하게 아픈 때를 제외하고는 허리를 펼 수 있고, 물리 치료실에서 시행하는 동작을 다 따라 할 수 있었다. 간혹 심하게 고통스러울 때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약간 절기도 하고 꼼짝 못 하고 몇 달씩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차차 정상으로 걸었고 일어나 거동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더하고 좀 덜한 차이뿐 통증은 여전했다.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잠이 쉽게 들지 않는 것이다. 몸이 아프니 잠이 들지 않고 잠을 자지 못하니 더욱 고통을 느끼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영국에서 살 때, 클레멘타인 처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담당 의사가 수술한다고 해도 결과는 50%의 확률이라고 했다. 본인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힘들겠으나 걸을 수 있기에 수술하기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 후, LA에 이주해 와서 다시 검진받았을 때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당신은 어쩌면 누워서 생활하게 될 경우가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두어 달에 걸쳐 물리치료를 받으며 검진을 마치던 날 의사가 내게 해준 말이다. 그날이 마침 내 생일이어서 치료를 받은 후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남편은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애썼으나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이 참담했다. 설움이 목줄띠까지 차올라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다.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감았다.

대학생인 두 아들이 떠오른다. 밝게 잘 자라 주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밥을 어떻게 짓는지, 라면을 끓일 때 물을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남편은 어쩌나. 80이 넘으신 어머니는. 멀리 있는 딸의 건강을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전화와 편지로 용기 주시는 어머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갑자기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머니가 보고 싶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이 막막함. 나는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때 동갑 남편이 딸을 타이르는 아버지같이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만약에 불행한 사태가 온다 해도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돈을 왜 벌겠어. 다 당신을 위한 것 아니오. 절대로 그럴 리 없고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24시간 당신 곁을 지켜줄 사람을 구하겠어. 저녁때는 물론 내가 있으니까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온 힘을 다할게요. 아프기는 해도 이제껏 잘 걸었잖아,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기분을 언짢게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의사 돌팔이 같아.”

눈물 흘리고 있는 내가 애처로웠는지 위로의 말을 열심히 하지만 그의 음성도 밝지 않다. 나 역시 그 의사가 돌팔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근래에 다시 받은 종합검진 결과로는 척추뼈가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척추 고정 수술을 할 수 있으나 그 수술 탓에 주위에 많은 조직이 상하기에 수술해도 통증은 여전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이제껏 수많은 검진을 통하여 들은 말을 종합해 보면 점차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결론이다.

 

디스크는 외적인 통증이기 때문에 섭생과는 상관없다. 그 부분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아픈 사람 같지 않게 멀쩡해 보인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나름대로 나를 다스리는 요령이 생겼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한 가지씩 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다만 그것이 나에게는 허리로 왔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동반자 디스크를 살살 어르고 달래서 함께 조심조심 살아간다.

 

지금까지 강산이 세 번 이상 변했다. 나의 오랜 아픔과 영혼의 외침이 뜨거운 맥박처럼 요동쳤지만, 누구든 내 표정과 모습에서 지병이 있음을 읽을 수 없다니 이 또한 얼마나 큰 은혜인가. 참으로 내가 나 된 것이 내 노력의 힘만으로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어느 여류 시인은 몸이 전신 마비가 되어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쓰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찌 다 감사를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고통을 통해서만이 받은 은혜에 더욱 감사가 넘치고 성숙해지는 삶, 값있고 경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한껏 물이 오른 갈맷빛 잎사귀들이 맑은 하늘 사이에서 보기 좋게 흔들린다. 푸른빛을 잃지 않는 저 청청함을 내 영혼의 빛깔로 삼고 싶다. 아직 내 모습이 밝게 보였으니 나머지 삶도 그런 모습을 잃지 말아야겠다. 설혹 더 큰 고통이 온다고 해도 맑고 밝게 흔들림 없이, 늘 푸른 소나무같이 의연하게 살리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감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튼실한 나무로 뿌리를 깊게 내리리라. 나보다 더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전화, 정성이 담겨있는 한 장의 카드를 준비하는데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든 간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