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정精

유숙자

로맨틱 발레 ‘장미의 정(Le Spectre De La Rose)’을 처음 관람한 것은 이화여고 노천극장에서였다. 임성남과 제자들이 가을을 수놓은 공연이었다. 나도 가을 공연을 앞두고 있던 터라 관심 있게 보았다. 여고생들의 공연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교가 뛰어나 관람객은 물론, 바람도 잠시 흐름을 잊은 듯하여 나뭇잎들마저 숨죽이며 이 공연을 관람했다.

베버의 음악 ‘무도회의 권유’ (Invitation to the Dance OP. 65) 가 경쾌하게 흐르는 가운데 섬세한 테크닉의 소녀와 몽환적 분위기의 ‘장미의 정’,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었다. ‘장미의 정’은 그날 이후 내 꿈의 발레였다. 언젠가 나를 찾아올 것 같은 그 배역을 위해 더욱 연습에 몰두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장미의 정’을 공연하게 되었을 때 꿈속에 그리던 그 배역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 역을 후배가 맡았기에 무척 섭섭했다. 스승님께서 내 마음을 아셨는지 쇼팽의 레실피드 중에서 왈츠를 춤추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장미의 정’은 1911년 4월 19일 베버의 음악에, 미하엘 포킨의 안무로 디아 길레프 발레단에 의해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었다. 프랑스의 시인 고티에의 시 ‘나는 장미의 요정, 어젯밤 무도회에 당신이 나를 데려가 주었다’에서 떠오른 영감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낭만적 스타일과 정교한 구성, 니진스키와 까르사비나의 완벽한 춤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발레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무용의 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니진스키는 발레 역사상 가장 훌륭한 남성 무용수로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는데 ‘장미의 정’ 초연 당시,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듯한 발롱(Ballon)을 실현해냈다. 새처럼 날아오르듯 창문을 빠져나갈 때 보인 포즈 발롱은 수수께끼로 남는 발레계의 전설로 전해진다.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는 1819년 베버가 33세 때, 생일을 맞은 사랑하는 아내 카롤리네에게 바치기 위해 작곡한 피아노곡이다. 평소 몸이 약해 춤추기 어려웠던 베버는 아내와 함께 춤추고 싶은 마음을 이 곡에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처음 만난 남녀가 춤을 추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즐겁게 춤추는 정경, 나누는 대화를 보며 자신과 카롤리네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곡을 1841년 베를리오즈가 관악으로 편곡한 것이 더 아름다워 널리 연주되고 있다. 베버의 기악곡 중에 가장 유명한 것에 속하며 낭만주의 시대 독일 신사의 기사도와 시정을 표현한 우아한 곡이다.

 

‘장미의 정’은 첼로의 독주 음률이 흐르며 막이 오르면 넓은 공간의 내실이 나타난다. 가구는 우아하나 검소하게 보이고 흰색 톤으로 장식한 방은 주인의 취향이 청순함을 말해준다. 구석진 곳에 침대가 있고 다른 쪽에 하프가 놓여 있다. 방의 뒤 모퉁이에는 커다란 프랑스식 창문이 열려있다.

처음 무도회에 참석하고 한 송이 장미를 가지고 돌아온 소녀는 지난밤의 무도회를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졸고, 쥐고 있던 장미 송이가 힘없이 떨어진다.

그때 장미 꽃잎을 몸에 감은 아름다운 ‘장미의 정’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장미의 정’은 잠든 소녀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의자 뒤에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쓰다듬어 깨운다. 소녀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서 ‘장미의 정’과 춤을 춘다.

그들은 꿈결같이 흐르는 즉흥적인 파 드 되(pas de deux)를 춘다. 그 왈츠는 순수하고 로맥틱한 환희의 이미지이며 반 인간의 모순을 지닌 장미와 춤을 추는 어린 소녀에 의해 더욱 시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소녀는 무아지경으로 도취해 춤을 추다가 의자로 돌아와 깊숙이 잠들고 정령은 황홀한 표정 속에 아쉬움을 간직한 채 창문 너머로 사라진다. 그 순간 소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꿈에 보았던 ‘장미의 정’을 떠올리며 마룻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집어 사랑스레 입맞춤한다는 내용이다.

 

발레의 유래는 15세기 밀라노에서 결혼식 막간극으로 시작하여 이탈리아에서 크게 융성했다. 이후로는 프랑스로 옮겨 1581년 세계 최초의 발레단(Le Ballet Comique de Reine)이 생기며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지지로 파리가 궁중 발레의 메카로 자리 잡아 낭만 발레의 꽃을 피웠다. 발레 전문 용어를 프랑스어로 사용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 황실은 낙후된 러시아 문명을 근대화하기 위해서 발레에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서구화의 가장 빠른 길이 발레를 도입하는 것으로 믿었던 표트르 대제가 적극적인 문화 진흥책을 폈다. 그 후 예카테리나 대제가 계속해서 발레 중흥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혁명 후 프랑스에서 차츰 시들어가던 발레는 한동안 이탈리아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가 러시아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에서는 프랑스 안무가 프티파를, 이탈리아의 체케티를 초청하여 발레 육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20세기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파블로바, 까르사비나, 포킨, 니진스키, 발란신 등 거장들이 배출된 것은 러시아 대제들의 문화 정책의 결정이라 하겠다.

 

가장 큰 감명을 준 ‘장미의 정’ 공연은 마고트 폰테인과 미하엘 바리시니코프가 탄생시킨 로열 발레다. 세계적인 영국의 발레리나 폰테인과 소련에서 망명하여 한창 신기에 가까운 테크닉을 선보이던 바리시니코프는 더할 수 없는 환상의 호흡이었다. 마치 내가 첫 번 무도회에서 돌아와 ‘장미의 정’과 춤을 추는 것 같은 간접 경험을 체험케 했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배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연출하는 분위기가 사뭇 몽환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발레가 들어온 것은 1931년 3월 서울 YMCA 강당에서 열린 러시아 무용수 슈하로프의 공연이다. 그 후 일본에서 발레를 공부한 한동인이 1946년 귀국하여 ‘서울 발레단’을 창단하고 처음으로 ‘장미의 정령’, 을 공연했고 이어 ‘라 실피드’를 선보였다. 한동인은 한국판 니진스키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교가 뛰어났다. 그가 6. 25 때 월북하면서 한동인을 계승한 사람이 임성남이다. 임성남은 일본으로 발레 유학을 떠나 발레단 활동까지 경험하고 돌아온 유학파 무용수로 대단한 실력의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1955년 ‘임성남 발레 연구소’를 설립하고 1956년 한국 최초로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했다. 우리 시대는 그에 의해 발레리나들의 선망인 ‘장미의 정’이 공연되었다. 임성남은 1962년 국립무용단의 단장, 1974년 국립극장이 명동에서 장충동으로 옮길 때 ‘국립발레단’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일찍이 발레를 공부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 놓쳐버린 대상이었기에 더욱 큰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을까. 발레가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절이었으니 열정과 야망으로만 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내 자질을 미리 아셨던 전능자께서 평생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쪽을 택하게 해주신 것 같다. ‘장미의 정’을 내 꿈속의 발레로 남게 해주시려고.

 

고요가 사위에 가득한 밤, ‘무도회의 권유’를 듣는다.

불현듯 내게 잊힌 가슴의 고동이 되살아나고 삶이 또다시, 한 번 더 아름답게, 매혹적인 모습으로 투영되어 온다. 밤은 사물을 낮과 다르게 부드럽고 신비에 찬 환영으로 다가온다.

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들린다. ‘장미의 정’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내게 손을 내민다. 이 떨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있단 말인가. 이 순간이 내게 주어지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지금도 느낄 수 있고, 영원히 그릴 수 있는 그리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된 옛꿈을 더듬으며 그를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파 드 부레(Pas de Bourree)한다.

스포트라이트가 눈처럼 쏟아지는 무대를 향해 힘차게 비상한다. 황홀한 도취, 짧은 만남의 긴 여운. 첼로의 음률이 밤의 고요 속에 잠긴다. (2010)

 

 

*발롱(Ballon)

도약하는 동안 공중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게 하는 기술

 

*파 드 되(Pas de deux)

여성 제1 무용수와 남성 제1무용수 두 사람의 춤이라는 의미.

아다지오, 바리에이션, 코다의 3부분으로 고전 발레에는 반드시 삽입된다.

 

*파 드 부레(Pas de Bourree)

촘촘하게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스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