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
유숙자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글귀다. 자연 속에 살아 있는 것들이 살찌고 열매 맺으며 마음이 풍성해지기에 저절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결실의 계절에 느끼는 풍요는 곧 전능자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다.
가을을 맞아 감사할 일들을 찾아본다. 종이에 적는다면 몇 장을 다 메우고도 남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평소에 자신이 원하고 갈구하던 것이 이루어져야 생기는 마음이다. 숨을 쉴 수 있는 것, 발을 디뎌 움직일 수 있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의 감사를 나는 실감하지 못했다. 평소 무심하게 지냈던 그것들로 어려움 겪고 난 후에 비로소 살아가며 얼마나 감사할 조건이 많은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며 일한 농부가 그 땀의 대가로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기쁨처럼, 수고와 인고를 통해서 얻는 감사가 진정 값진 것이리라.
밀래의 만종을 보고 있으면 진지한 종교적 심상을 느끼게 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는 때에 멀리서 울리는 교회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머리 숙여 두 손을 모으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 그들의 소박하고 진지한 모습은 전능자를 향한 외경인 동시에 경건이다. 그 그림을 대하고 있으면 신선한 노동과 평화로운 휴식과 고요로움, 수고하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깨닫는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슬픈 이야기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무심히 하루를 지나 잠자리에 들 무렵, 벽에 걸린 만종을 보며 아차 싶어 잊었던 기도를 드린 적이 많았다.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사가 새록새록 움트게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경건과 감사를 한데 묶어 놓은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느 때인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친지 한 분이 입원하여 병원을 찾았다. 그분이 입원해 있는 병실 복도에 기도문이 걸려 있었다. 그 글은 죽음이 임박해 있던 어느 여인이 써 놓은 글이라 한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감사의 조건으로 내 세울만한 것이 아니나 하루하루 힘들게 투병하며 살아가는 그 여인에게는 내일을 향한 외경이며 진정한 감사였다. 글을 읽으며 얼마나 가슴이 저리던지. 받은 것이 많건만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온 내 삶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아침에 눈을 떠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맑고 청아한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걸을 수 있게 다리에 힘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 수 있도록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삶이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일까. 여인은 남들이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일상을 초월한 의미와 기쁨을 찾아냈다. 괴로움을 통해서 삶을 충만하게 체험했다. 가장 작은 것에 감사와 애정을 기울이고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사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단 하루뿐인 오늘을 살고 있기에.
뚜루게네프의 산문시 “거지”에 보면 동냥을 구하는 늙은 거지에게 무엇인가 주기 위하여 주머니를 뒤졌으나 지갑도 안 가지고 나왔고 시계도 손수건조차도 없었다. 너무나 미안해진 주인공은 늙은 거지의 더럽고 파리한 손을 꼭 잡으며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음을 사과했다. 그러자 거지는 ‘돈보다 더 고마운 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주인공은 ‘나 역시 그에게서 선물을 받을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거지는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 동냥할망정 인간의 가치를 정신적인 것에 두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있는 나를 본다.
뿌린 씨앗 풍성히 채워주셨기에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살아야겠다. 감사야말로 축복이 내게 임하는 길이기에 감사를 떠나서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구하여 얻기 이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받을 성숙한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향기가 묻어나는 생동감 넘치는 삶, 마음에 행복이 깃드는 삶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계절이 무르익어 간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