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들이
유숙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에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여섯 가정이 1년여를 차근차근 준비하여 떠난 여행이다. 처음에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다녀오자 했던 4주 예정의 대륙 횡단이었으나 무리가 따를 것 같아 다시 절충했다. 2주로 줄여 필라델피아까지는 항공편을, 거기서부터 차로 움직여 미국 북동부 메인주의 바 하버(Bar Harbor)까지로 일정을 잡았다.
떠난다는 것, 일상의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평소 가 보고 싶던 곳, 말로만 듣던 곳을 다녀온 나는 건강하고 즐겁게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어 감사했다. 전체적으로 단풍이 골고루 물들지 않은 아쉬움도 있었으나 오히려 푸르고 붉은 색조가 조화된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누군가 커다란 붓에 물감을 듬뿍 찍어 가을을 한 폭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가을바람, 가을 고요, 변해가는 자연을 바라보며 가을 정취를 맘껏 호흡하며 유유자적했다. 여행을 값진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낯섦과 미지에 대한 기대와 발견 같다.
단풍 색깔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기다릴 것만 같은 여행 속으로 첨벙 발을 내디뎠다.
동부는 내가 예상했던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도로변은 끝 간데없이 이어진 나무들로 거대한 숲처럼 보였다. 달리는 차 속까지 가을 내음이 스며드는 듯했다. 나무의 채취가 향기처럼 내 안에 충만했다. 지친 영혼을 청정케 해주는 자연의 속삭임. 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 낙엽이 깔린 오솔길을 마냥 걷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나뭇잎 하나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낙엽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신을 맡겼을 때 가장 편한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여/ 자기 맘속을 들여다보아라/ 거기 성스러운 나무가 자라고 있도다/ 즐거움에서 성스런 가지로 뻗고/ 그 위에 온통 꽃들이 피어 하늘거리도다/ 변해가는 열매의 빛깔은 별에게 즐거운 광채로 보냈고 /숨은 나무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밤마다 정적을 심었다.> 예이츠의 시가 떠오른다.
LAX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밴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첫 기착지인 뉴욕 주의 Saratoga Springs에 도착했을 때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곳은 광천수로 유명한 곳이다. 이 물이 위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온천은 많은 사람으로 늘 붐비지만 1인 1실이다. 따뜻한 물이 넘쳐 흐르는 욕조와 간이침대가 있어 피로를 푸는데 그만이었다. 며칠 묵으면서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고 싶었다.
다음 날 버몬 주 Shelburne Farm을 향해 북상했다. Burlington근처의 Essex에서Car Ferry를 타고 Lake Champlain을 건넜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경쾌하게 물 위를 나를 때 스트레스도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Shelburne Farm은 숲이 울창한 공원 같았다. 주변 경치가 빼어나 관광마차를 타고 오솔길도 걸으며 한낮의 여유를 즐겼다. 다음 행선지인 버몬 주의 주도 Montpelier를 거쳐 뉴햄프셔 주의 Jackson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예약된 숙소는 모두 2층이다. 방마다 어찌나 예쁘게 꾸며 놨는지 마치 신혼방을 방불케 했으나. 계단이 가파른 게 흠이었다. 나는 아래층으로 부탁했는데 빈방이 없어 본관 밖에 있는 오두막으로 안내되었다. 방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았던 듯 냉기가 돈다. 스텐드에 먼지가 뽀얗다. 깊은 산 속, 주변 경관이 뛰어나서인지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어렵게 구했고 숙박료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불편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먼지를 대충 닦아낸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불면증이 심한 내가 자리까지 떴으니 쉽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수면제를 복용했는데도 정신이 또렷하다. 밖에 나가 맑은 공기라도 마셔 볼 양으로 일어나려는데 이불자락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불을 켜고 보니 쥐똥이었다. 에구머니!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바람이 남편이 깨었다. 이불 위의 쥐똥이라니. 나는 쥐를 유난히 싫어하는데, 너무 놀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여행 초장부터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힘들어도 그냥 2층으로 올라갈걸. 역겨운 냄새로도 모자라 쥐똥까지 만졌으니 속이 부글거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상쾌했다. 투명한 햇살, 맑은 공기. 나무가 숲을 이루어 오존층이 잘 발달 된 것 같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다는 워싱턴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이 가파르고 좁은 길이라 조심스럽게 움직여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미국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불었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 야~호~를 외쳤으나 바람이 소리를 삼킨다. 너무나 미미한 존재, 한 개의 점으로 서 있을 뿐. 저 멀리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내려다본다. 그속에서 아옹다옹 사는 사람들. 산속에 있으니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하찮음이 더 실감 난다. 하산을 서둘렀다. 내리막길은 위험했다. 오를 때는 앞만 보며 꼬부라져 들었으나 내려가는 길은 저 밑 평지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길 가장자리는 낭떠러지기라 굽이굽이 돌며 내려가는데 오금이 저렸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운전에 방해될까 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의 삶도 환히 내려다보며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면 이보다도 더 오금이 저릴 것 같다.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Jackson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을 즈음 눈에 익은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지붕이 덮인 다리.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와 거의 비슷하다. 눈앞에 펼쳐진 다리를 보며 영화이야기로 한동안 갑론을박했다. 주변이 아름다워 그 다리 위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저쪽에서 카메라를 든 로버트와 프란체스카가 걸어올 것 같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낸 노을빛 사랑을 안고.
단지 나흘이었다. 나흘간의 사랑.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불륜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여성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고 앉아 있었다지 않던가. 왜 사람들은 영화 속의 사랑을 그리도 안타깝게 보았을까. 왜 결혼한 여성들도 그런 사랑을 꿈꾼다 했을까. 왜 영화와 현실을 혼동할 정도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600만이나 되는 사람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물질 만능시대, 순수한 사랑이 모자란 이 사회에서 누군가 일상의 틀을 깨고 과감하게 시도한 사랑으로 대리만족을 느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다리를 떠났으나 길을 잃어 3번이나 다시 건너야 했다. 이 역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었다.
메인 주 Bar Harbor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동북단 끝의 조그마한 도시. 유럽의 어느 관광지에 와 있는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바다가 아름답다. 미국 랍스타 공급의 50%를 생산하는 곳이라 해변의 식당에는 랍스타 그림으로 도배를 했다. 인근 록랜드에서 해마다 7월 말에서 8월 초에 랍스타 잔치가 열린단다.
기념품 가게마다 아틀란틱 푸핀(Atlantic Puffins)이 담긴 카드 일색이다. 부리와 발이 빨갛고 배가 흰색, 등이 검은빛을 띤 10cm 정도의 작고 앙증맞은 예쁜 새인데 이곳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동이 틀 무렵, Cadillac 정상에 올랐다. 미국에서 제일 먼저 해가 돋는 곳이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인파가 붐빈다는데 날씨가 흐려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다. 먼 곳에서 찾아온 우리 일행을 반기려는 듯 잠시 해가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구름 뒤로 숨었다. 시커먼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하산을 서두르는데 갑자기 뺨의 촉감이 서늘하다. 는개였다. 아니 너무 미세하여 비라기보다 젖은 공기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살포시 젖어 윤기나는 나뭇잎.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영혼을 청정케 해주는 자연의 선물 같다. 동부의 최북단 마운트 데저트 아일랜드에 있는 아케이디아 국립공원은 메인 주의 자랑으로 20세기 초 신흥재벌이 여름별장으로 이용하던 곳인데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전체 면적 60%를 국립 공원에 기부했다.
드디어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은 건국 2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의 중심지다. 진보적 사상과 보수적인 생활, 활기찬 현대적 도시와 조용하고 차분한 고도가 공존하는 독특한 색깔의 도시이다. 하버드, MIT, 보스턴 등 미국 최대의 대학도시답게 건물들이 고색창연하다. 사람들이 키가 커 보이고 대부분 정장 차림이었다.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들만이 가진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일정을 서둘기 위해 일찍이 Plymouth로 출발했다. Mayflower 호를 타고 미 대륙에 처음 상륙했던 지점에 있는 Mayflower II (복제판)과 Plymouth Plantation을 관람하며 개척자들의 일상생활을 둘러보았다. 장식품과 식기, 가구 등을 예전 것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의 의상을 걸치고 앉아 있는 여인들이 인형처럼 고왔다. J. F. Kennedy 도서관과 박물관을 관람하고 하버드 대학을 관광했다.
하버드 대학은 처음에 청교도 목사를 육성하는 대학으로 세워졌으나 종합대학으로 바뀌면서 미국 최고의 위치에 놓여 있는 대학으로 변했다. 보스턴 근교의 케임브리지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로 케네디를 비롯한 5명의 대통령과 3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반인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몰라도 늦은 저녁이라 낙엽이 누렇게 깔린 캠퍼스만 구경하고 나왔다. 나도 하버드 대학을 나온 셈이다.
뉴욕은 비가 내렸다. 뉴욕의 N. Piers 83에 도착, 허드슨 강을 따라 3시간가량 맨해튼을 일주하는 배에 올랐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 갑판에 나갈 수 없었으나 창을 통해 봐도 어마어마한 도시임을 한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빌딩 숲, 인간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위대함이다.
가장 화려하다는 뉴욕 5번가는 세계 패션과 문화의 창조지 답게 멋졌다. 상가에서 내뿜는 현란한 불빛만으로도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예전에 영화에서 익히 보아 왔던 뉴욕 거리. 섣달그믐이면 물결처럼 인파가 모여드는 곳. 타임스퀘어 아래서 새해맞이 숫자를 합창하던 그곳에 내가 서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인파 속에 휩쓸려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있는 America Ballet Theater도 구경하고 싶고, Russia Tea Room에 앉아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시간이 촉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브로드웨이를 가면 뮤지컬이나 연극을 한 편 감상하리라 별렀던 숙원도 이루지 못했다. 일정이 너무 빡빡했고 이미 밤이 깊어 다시 뉴저지의 숙소로 가야 했다. 아! 시간이 그냥 그 자리에 멈추었으면 싶었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고 Empire State Building으로 갔다. 전망대에 올라가 뉴욕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눈 아래로 활짝 펼쳐진 거대한 도시. 과연 세계 제1이라는 도시의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World Trade Center가 어디 있었는지 흔적조차 사라진 가운데 역사가 무너져 내리던 그날의 정경이 눈에 어른거린다. Rockefeller Center, Metropolitan Museum of Arts 등 수많은 명소를 관광하고 Central Park를 걸었다. 평소에는 음악회가 열리던 Park에 그날은 아무 연주회도 없어 서운했다. 뉴욕은 대도시답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친다.
가을바람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계절. 떠남에서 시작하여 일상을 벗어나 떠남으로써 세속의 먼지를 씻고 신선한 감정과 해방감을 만끽했다. 2주 동안 12명이 함께 움직이며 모두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할 수 있었음이 무엇보다 감사하다.
멀어서 가 보고 싶은 곳이 비단 미 동부뿐일까마는 역사와 문화의 체험을 경험하며, 광활한 자연을 호흡하며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아직도 찬란하게 형형이 빛나던 브로드웨이 밤거리가 눈에 어른거리고 바람이 엮어내는 정담, 뉴잉글랜드 가을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것 같다. 우리의 인생 여정 또한 여행과 다를 바 없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살고 있기에 설렘, 두려움이 공존한다. 인생의 늦가을에 처한 내가 다양한 색채의 가을을 호흡하고 돌아오니 심신에 청량감이 넘친다.
4계절의 구별이 분명치 않은 이곳 캘리포니아도 가을이 내리고 있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