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에 젖은 로망스
유숙자
모든 예술가는 그가 자기 일에 온 힘을 다하는 순간에 떠나기를 원한다. 좀 극단적 표현일는지 모르나 음악가나 무용가, 연극인들은 공연 도중 무대에서 숨을 거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들을 곧잘 한다.
모차르트가 그 대표적 음악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의 마지막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유례없는 명성으로 시작했고 누구도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궁극의 악상이 거침없이 풀려나와 한 생을 종횡무진으로 뛰며 작곡하고 연주했다. 평생이 한결같았다면 최상의 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생애를 마칠 무렵엔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외롭고 슬프고 막막했다. 정신력이 허약했고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지만, 밝고 정교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남겼다. 그런 것을 고려할 때 그는 죽음으로서 생애가 더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차르트 자신도 죽음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신념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프리메이슨 회관 신축 기념으로 작곡한 칸타타 “우리들의 기쁨을 널리 알리소서”를 연습하는 지휘 도중에 열병으로 쓰러져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2주 만에 눈을 감았다.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자신의 음악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일과 함께 쓰러지는 영광을 안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생전에도 천재적인 예술가로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 짧은 생애를 통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후세에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음악가로 지칭 받은 그가 말년이 불운하여 놀랄만한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떠났음이 안타깝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생애에 얼마만큼 근접하게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한 감동을 전한 영화임은 틀림없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으나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자막을 올리며 10여 분 동안 들려주었던 피아노 협주곡 작품 20번의 제2악장 로망스는, 한 음악가의 삶과 인생의 비극적 요소를 함축성 있게 보여줄 만큼 긴 여운을 남겼다. 이 아름다운 테마는 처음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도 색다른 감동을 하였다고 말한다. 슬프고 애잔하면서 부드럽고 회상 적이어서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체념하고 달관한 후에 갖는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곡은 음악적 기량이 가장 완숙한 시기에 쓰인 영향도 있겠으나 피아노 협주곡 27곡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1785년 2월 10일에 완성하여 그다음 날 11일에 모차르트 자신이 피아노를 맡아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했다. 이 곡의 가장 큰 특징은 단조로 쓰였다는 점이며 단조 특유의 우수를 띤 정서가 낮게 드리워져 있다.
어떤 운명적 암시를 예고하는 듯 서정이 짙게 깔리는 전반부를 넘어, 평화로우나 애수 어린 슬픔이 배어나는 중반부를 지나면 드디어 힘차고 화려한 론도 형식으로 바뀌며 같은 주제가 반복된다. 경쾌한 내용과 결합하여 빠른 템포로 펼쳐지면서 곡이 끝나기에 한 곡에서 다양한 음악적 감성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뛰어난 곡이다.
당시의 음악은 귀족들의 여흥을 돋구는 정도의 목적으로 쓰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단조의 사용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 곡은 이전까지의 협주곡들과 달리 관현악 파트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주목받았다. 과거에는 반주부의 기능만을 담당하던 관현악 파트가 피아노와 거의 대등할 정도의 입장을 차지하여 피아노와 관현악의 대화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이 피아노 협주곡에서 모차르트는 협주곡적인 것과 교향곡 적인 것의 융합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고 모차르트 연구가들은 평한다.
오래전, 내 이웃에 피아노를 전공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해였나 그녀가 피아노 콩쿠르 자유곡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작품 20번의 제2악장을 선택하여 맹연습했다. 그때 이 곡을 듣게 된 것을 나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처음에는 매끄럽지 못한 연주로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콩쿠르를 며칠 앞두고 한 사람의 관객 앞에 마지막 리허설을 폈다. 늘 듣던 연습곡이 아닌 우수 어린 배경에 잔잔하게, 아름답게, 때로는 격정적인 음률로 다가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이던 것을 기억한다.
음반을 접하게 된 것은 하스킬의 연주였다. 이 대가의 연주는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퍼서 단 한 번의 연주를 듣고 감동해서 지금까지 가장 애장하는 곡 중의 하나다. 그것은 어쩌면 하스킬의 연주였기에 더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비애였던 것 같다.
역경을 딛고 한 세대를 풍미한 주옥같은 음반을 남긴 사람들. 신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시련을 더 주신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고난 속에 이루어 낸 창작이다.
모차르트는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클라비어를 배웠고 7세 때에 이미 미뉴에트와 트리오 등을 출판하여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퍼졌다. 파리 연주 여행 때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5세 앞에서 천재의 묘기를 발휘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재능은 날로 원숙했으나 그를 도와주던 오스트리아 황제가 사망하고 잘츠부르크의 대사교도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위해 반생을 바쳐온 아버지 레오폴트의 사망과 어린 자녀의 잇따른 죽음,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그는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791년 가극 마적을 작곡하고 있었을 때 몹시 건강을 해쳤던 것 같다. 그해 가을, 그는 병고와 경제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을 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귀족의 심부름꾼이었으나 모차르트는 그를 죽음을 예고한 신의 사자라고 여겼다. 모차르트는 몹시 슬퍼하며 작곡에 열을 쏟다가 당시 빈에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려 레퀴엠을 완성 시키지 못한 채 그해 12월 5일에 숨을 거두었다.
빈의 관리들은 열병이라 전염이 될까 봐 급히 매장해 버렸다. 아내 콘스탄쩨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을 치러 매장이 끝난 상태였고 유체를 따라간 사람이 없어 정확한 매장 장소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천재성에 비한다면 너무도 비극적 생애를 마쳤다. 공동묘지에 묻히지만 않았어도 유해가 행방불명이 되는 불운한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 성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 무덤에는 유골이 묻혀 있지 않고 빈 중앙 묘지에 베토벤과 나란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700여 명작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해가 지지 않을 정도를 세계 각지에서 오늘도 연주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이렇듯 모차르트의 음악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남들은 평생 해도 못다 하는 일은 그는 그토록 짧은 생애 동안에 열정을 다해 이루어 놓고 떠난 것이 애석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작곡자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 독특한 리듬의 흐름으로 “모차르트”하고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런가 하면 우수에 젖은 로망스처럼 비애가 흐르고 있는 음악도 있다. 평탄치 못했던 인생의 고뇌가 암암리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감명이 깊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작곡자의 영혼에 깃든 영감과 고통의 무게를 다시 한번 헤아려 보게 된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