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연결 고리
유숙자
전화선 저쪽에서 들려오는 조카의 음성은 불어를 말하듯 세련된 비음이다. 내 음성인 줄 알아차리곤 금방 어리광 섞인 느릿한 말씨로 변한다.
“이모,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민이 학교에 들어간 다음부터 정신이 없었어. 과제물 챙겨주랴, 숙제 돌보랴, 이건 애가 학교에 다니는 건지 내가 다니는 것인지 모르겠어.” 조카는 내 전화를 받으며 미안해서 변명하기 바쁘다.
내 곁에 와서 일 년 남짓 딸 노릇 하다가 서울로 다시 갔기에 가끔 생각나고 게다가 이곳에서 프리스쿨 다닐 때 멋스럽게 발음을 굴리던 네 살배이 손녀가 궁금해서 한 전화였다.
“이모, 미안해.”
“미안해할 것 없어. 나는 너보다 한가하니까 내가 전화해야지. 모두 건강히 잘 있으면 됐어.”
전화를 끊고 앉아있던 나는, 지금 조카에게 한 말에 깜짝 놀랐다.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겨서 한 것이다. 조카에게뿐만 아니라 나이 들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자주 나왔다.
결혼할 당시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내게 가까운 시댁 어른이라고는 시고모님 한 분이셨다. 시고모님은 자그마한 키에 한복이 잘어울리 분으로 젊었을 때는 꽤 미인 소리를 들으셨을 만큼 자태가 고우시다. 교양과 덕을 갖추셨고 신학문을 익히셨기에 문중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셨다.
새댁 시절, 내가 살던 화곡동에서 시고모님 댁인 수유리까지는 끝에서 끝이었다. 그 먼 거리를 일 년에도 몇 번씩 조카 내외를 보러 오셨다. 나는 시어머니 대하듯 오실 때마다 정성을 다해 대접했고 가실 때는 교통비를 봉투에 넣어 손에 쥐어 드렸다. 시고모님은 생활이 윤택하셨지만 내가 봉투를 드리면 무척 좋아하셨다.
“어멈아, 신접살이에 아껴 써야지 무슨 여유가 있다고.” 말씀은 그리하셔도 시고모님의 얼굴은 희색이 만면하시다. 그런 모습이 뵙기 좋았다. 적당히 사양하면서도 기뻐하며 고마워하시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 시고모님에 대해 아주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는데 한 달에 두 번씩 주시는 전화였다. 매번 어른의 전화를 받는 것이 송구스러워 다음에는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이들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면 어찌 그리도 세월이 빨리 가는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또 전화를 주신다.
“고모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서 전화에다 대고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얘야, 나는 한가하니까 내가 전화해야지 너희가 오죽 바쁘냐. 전화도 집안일에 손 떼고 비교적 시간이 많은 어른이 하면 되는 거다. 조금도 미안해할 것 없어.” 하시고 일상적인 안부를 물으신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이 부분. 결국, 나는 윗분의 전화만 떼어먹는 무례한 조카며느리가 되었다.
시고모님은 우리 내외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하신 적은 없어도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눈빛, 남편이 고등학교 때 양친을 모두 여의었기에 거기서 오는 연민이셨던 것 같다. 유독 다정하게 지내셨다는 손위 오라버님에 대한 사랑의 연결고리가 막내 조카에게 옮겨진 것은 자연스러운 정의 흐름이리라. 행여 시댁 친척 간의 연중행사를 잊을세라 그날이 임박하면 넌지시 전화 끝에 귀띔해 주심으로 대소사에 실수 없도록 챙기셨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내가 그때의 시고모님 연세만큼 된 것 같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그 외 두루두루 신경 써서 전화해야 할 경우, 나도 모르게 예전에 시고모님이 하시던 말씀이 그대로 술술 나온다. 결코, 내가 한가한 시간이 주어져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에서 오는 경험과 삶 속에서 밀물지고 썰물 지는 세상살이를 이해하고 포용하기까지,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기에 찾아온 삶의 여유로움이다. 보고 싶고 그립기에 그냥 거는 전화, 그때의 시고모님도 지금의 내 마음 같으셨겠지. 전화해주시던 시고모님이 가신지도 꽤 오래되었다. 늘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기에 무의식에 그분의 사랑 방식이 내게 스며든 것 같다.
나이 들면 많은 것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사랑과 관심과 아름다움으로부터. 가장 불쌍한 여인이 잊힌 여인이라 하지 않던가. 머물지 않는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사랑으로 결속될 때, 사람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져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것 같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