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만의 해후

                                                                                                                                                          유숙자

해변문학제에 초대될 강사가 수필가 B 선생님으로 결정되었을 마음은 파도가 일었다. 십여 이상 그의 작품세계를 알고 있어도 만난 적이 없었던 수필가. 그분을 가까이에서 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생각에서이다. 나는 12년간 그가 일구어 놓은 텃밭에 들어가 싱싱하게 자란 채소와 과일과 열매를 맛보며 그가 일궈놓은 토양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을 같고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가 이곳에도 있다는 자랑을 하고 싶었다.

 

해변문학제 전야제에 B수필가를 환영하는 만찬회를 가졌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분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무심이다. 손을 덥석 잡고 속내를 풀고 싶었으나, 또한 무심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만났다.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을 이루는 바닷가에서 B 수필가를 모시고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에 내가 품어왔던 세월을 어찌 풀어낼 있을까 걱정되었다. 수필집 정바라기" 만나게 사연과 속에 파묻혀 있었기에 행복했던 시간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그분은 , 그랬군요.” 환히 웃어 보였으나 차분한 말씨다. 감정의 변화가 없다. 그렇게 번째 만났다.

 

장르별 그룹 토의는 열띤 한마당이었다. 선생님의 명강의에 눈들이 반짝인다.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경청하고 질문도 한다. 눈부신 7월의 햇살이 바다에서 넘실거린다.

바다, 하늘, 나무가 아름다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곳에 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싶었다. “나이 들어서는 사진 찍지 말아야 해요.” 입으로 그렇게 말해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 앞으로 몰린다. 모두 어린아이 같다. 어느새 지기가 되었다. 벤추라 해변에서는.

 

1992 겨울, 서울을 다녀온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불과 얼마 전에 뵈었을 그리도 정정하시던 어머니였는데 갑상선 암이라니. 소식을 접한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위독하다는 전화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비행시간 동안 마음 졸이며 드린 기도는 내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생존해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기도氣道가 막혀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우선 목에 구멍을 내셔서 위기는 면했으나 음성을 잃으셨다. 사랑하는 딸이 왔는데 쳐다만 보고 계신다. 불과 만에 어찌 이렇게 사람처럼 되어 있을까. 무슨 생각을 저토록 골똘히 하실까. 초점 잃은 눈은 허공을 향해 있다.

 

어머니 곁에 10주를 머물렀다. 형제들이 그만 떠날 것을 권했으나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가면 다시는 같았다. 의사도 상주하는 간호인이 있고 아직은 어머니가 견뎌낼 힘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고 한다. 떠나기 전날 처음으로 외출했다. 서점을 찾았다. 눈에 책이 들어올 만무했으나 책방에라도 들렀다가 가야 답답한 가슴이 트일 같았다.

 

내가 정바라기 만나게 것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였다. 수필 섹션 앞에서 오래 있다가 눈이 닿은 책이 정바라기이다. 제목이 특이했다.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식 문창 살이 그려져 있는 겉장이 정겨워 보여 집어 들었다.

서울에서 책을 때마다 답답한 것은 잠시 다니러 와서 좋은 책을 고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터득한 방식은 작가의 서문을 읽고 작품을 평한 문학 세계를 읽어보며 선정한다.

우선 책장을 넘기면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정이 그리워 정에 매달려 보낸 어린 시절과 정을 전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넘쳐 흘렀다. 거기에 더하여 극찬으로 표현한 김열규 교수의 서평이다. 이쯤 되면 수확으로 충분할 같았다.

 

책에서 김열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서평을 했다.

올이 극히 가느다란 색실로 수놓아진 가리게 병풍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것이 변해명 수필가의 작품에서 필자가 받은 인상이다. 그의 수필은 실제로 언어의 극세공품이기 때문이다. 낱말 하나, 구절 가닥, 비유법 토막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예리하게 커팅된 보석의 의장과 빛살을 담고 있다고 해도 좋을것이다. ”라고 평했다. 김열규 교수는 변해명 수필가의 작품세계를 자신이 글처럼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했다. “언어의 극세공품 라는 표현이 나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했다.

 

나는 책을 통해 미지 작가의 토양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를 때로는 만나보고 싶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B 수필가가 낯설지 않고 예부터 알고 지낸 느낌이 들었지만,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정바라기 책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의 인연으로 다가갈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만남과 그리움을 키울 있게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정에 매달려 사는 나를 찾아온 것일 게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