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의 가족
묘지 앞에 커피가 놓여있다. 기일을 맞아 모터싸이클을 함께 즐기던 유태인 친구가 다녀 갔음이 분명하다. 아침이면 항상 스타벅스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던 아이를 기억하는 애틋한 마음이리라. 내 사위 루크가 흐린 눈앞에서 나를 보고 있다.
그 아이가 떠난 지 어언 5년이 지났다. 두살 반 아기였던 손자가 일곱살 반의 소년으로 자란 모습이 시간의 흐름을 절감케 한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쿨에서 만난 그 아이와 딸은 3년 동안 공부를 같이 하고 변호사 시험에 패스하기까지 늘 함께였다. 영국계 백인으로 용감하고 자랑스런 미 해병을 다녀온, 원칙과 성실을 벗어나지 않는 청년이었다. 미국교육을 받고 자란 딸이지만 막상 백인 사위 후보감과 첫 대면을 앞두고 우리 부부는 생소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 집을 처음 방문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약속된 시간이 거의 되어 창문 틈으로 엿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트럭을 주차하고 내리는 청년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아 일단 친근감이 느껴졌다. 작은 몸을 가진 딸아이와 어울려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더트 바이크라는 산악용 자전거를 실어야 하기에 트럭을 몰고 다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딸을 모터사이클 꽁무니에 태우고 어디든 다녔다는 것도 들었다. 유난히 스피드를 즐기는 아이라서 터프한 성격이라 짐작했지만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안전에 대한 준비가 너무도 철저했고 속도도 그리 내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좋은 품질의 장비를 갖추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집안에서 신발을 벗는 우리의 관습을 따르려 신고 온 부츠를 벗어 얌전히 세워놓고 다리도 모으고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내심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모델활동을 하였다는 친할머니를 둔 미남청년, 깊은 눈의 속눈썹은 반 인치 가량이나 되었다. 그를 꼭 빼어닮은 손자의 속눈썹이 보는 이마다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긴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요리와 손재주가 돋보이던 아이였다. 딸이 임신했던 내내 점심과 간식을 챙겨 주었다. 우리 집에 온 날이면 식사준비를 하는 내 곁에서 한국음식 조리법을 배우겠다며 돕곤 했다. 석 달에 한번 주말엔 온 집안의 자동차를 모아 오일 체인지를 일제히 해 주었다. 모터사이클도 손수 정비하고 닦아 놓아 항상 새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운동하여 만든 근육 팔뚝을 자랑하던 아이. 딸아이는 그 팔에 매달리기를 즐겨했다. 손자가 태어난 후 로펌을 만들어 경영할 때도 틈내어 피트니스 센터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기타를 치는 모습이 좋아보인다며 저도 배우고 싶어 하였다. 딸은 그 해 생일선물로 기타를 준비했지만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생일을 앞두고 떠나갔다. 나는 가끔 그 기타를 치며 애잔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에서, 산을 즐겨 타는 사람은 계곡에서 그 품에 안겨 가는 일을 많이 본다. 그토록 좋아하던 모터사이클과 함께 그 아이도 떠났다. 엔젤스 크레스트 산길을 내려오던 커브길에서 자동차와 일어난 충돌사고였다. 핼멧도 안전복도 소용 없었다. 공중으로 날아가 떨어진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와 두살 반의 아들을 두고 서른 다섯의 삶이 멎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멀어져 갔을까.
마른 피로 얼룩진 양말과 부츠, 그리고 찢어진 가죽 수트 만이 남아 참혹한 때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모터사이클을 실컷 타고 있으려나. 아니면 좋은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많은 이를 즐겁게 해 주고 있을까. 항상 누구를 도와주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던 선한 아이의 눈빛이 그립다.
아들처럼 사랑했던 그 아이, 사위로 머물렀던 3년 여의 시간이었지만 가슴 깊이 남아있다. 허물과 단점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떠나간 아이. 그래서 더욱 미워할 수 없는 아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족이다. I love you, Lu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