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타령
아, 키가 크면 얼마나 좋을까. 외손녀에게 바라는 간절한 할미의 소원이다. 자기 나이 또래보다 키가 작은 외손녀. 나는 그 나이에 키가 너무 커 키다리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외손녀는 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 계속 키가 자라주기만을 바랄뿐이다.
현대에 사는 젊은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키 크기를 소원한다.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키가 크면 훤칠해 보이고외모상으로 점수를 따고 들어가 좋은 인상을 주게 된다. 키 큰 사람들이 요즈음은 대우를 받지만, 예전엔 그렇지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것도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요즈음 시간을 내어서 오래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첩에 꽂아 두기 위해서다. 이민 올 때 보물이라도 되듯 소중하게 싸 가지고 온 옛날 사진들 가운데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 한 장. 초등학교 졸업 사진이었다. 한참을 쳐다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찌하랴.
제일 키가 큰 순서대로 제일 뒤 한복판에 남녀 둘을 세우고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한 줄 세우고 두 번째 세번째 이런 순서대로 줄을 서서 찍은 사진이다. 초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나는 남녀 합해서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컸다. 나는 사진에도 키가 크게 찍혀 나타나는 것이 싫어서 옆에 선 남학생보다 키를 적게 하려고 한쪽 다리를 꺾고 한쪽어깨를 축 내려오게 해서 사진을 찍은 것이 어찌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누가 보아도 웃지 않을 수 없으리라.
지금은 여자가 키가 큰 것이 자랑이고 모두가 키가 크기를 바라지만 6.25 한국전쟁 직후에는 키 큰 남녀가 별로 없었고 대부분 작은 키였다. 나는 키가 큰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약간 숙이고 허리도 굽히면서 학교 복도를 지나다녔다. 남학생들은 내가 자기들보다 키가 더 크니까 심통이 났는지 모르지만 나만 보면 놀려대고 시시덕거리며 킥킥 웃어댔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노는 휴식시간에 남학생들이 여러 명이 복도에 일렬로 줄을 서서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면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놀란 토끼 키다리 섯발 장대야 ….랄 라 랄 라 랄 라 라 랄라라라……” 나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그 노래 가사가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얼굴도 희고 머리카락도 갈색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서양사람 같이 생겼다며 가끔 놀려대곤 했다. 집안에서도 부모 형제가 놀릴 때가 있어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무심히 한 마디 던진 말이라 해도 어린 마음에는 키가 크고 서양사람 같이 생겼다는 말이 창피하게 들렸다.
그 후 십 년쯤 지나서 키 큰 것이 흉이 아니고 오히려 알아주는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의 큰 키에 호감을보여 준 분이 김영태 화가 겸 시인이었다. 김영태 시인은 큰 오라버니와 친한 사이로 우리 집에 가족처럼 드나들면서 흉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이 분은 나에게 화가로서 아름다운 그림을 직접 그려 넣은 도화지 종이에다 굵은 펜으로 시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이분은 인물화(커리커쳐)를 그리는 화가인 동시 시인이며 무용 평론가(발레)이기도 했다.
이분이 쓴 시 가운데 나의 큰 키를 미인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라고 해서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나의 큰 키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분은 나를 볼 때마다 하히힐을 신고 다니라고 권유했다. 그러지 않아도 키가 큰데 그기다 키가더 커 보이게 하이힐을 신으라고 하니 나는 난색을 하면서 안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생각이 난다. 다리가 길고 각선미가 좋아서 하이힐을 신으면 정말 멋있을 거라며 적극적으로 권유했지만 나는 끝내 한 번도 하이힐을 신지 않고 청춘을 보냈다. 키가 큰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키 큰 것을 뽐낼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멋쟁이였던 내가 왜 하이힐을 신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하고 웃음만 나온다. 동생 김영교 시인은 요즈음도 나를보면 바지 입지 말고 치마를 입고 백만 불짜리 각선미를 자랑하라며 성화다. 살이 찐 내가 각선미도 변화가 왔다는 진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한 표정을 짓곤 한다.
동생 김영교 시인이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키가 훌쩍 크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보다 몇 센티 더 커서 나는 안도의 숨을 내 쉬게 되었다.외출할 때마다 같이 나갈 때는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동생의 큰 키에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동생과 함께 나가면 나의 키 큰 모습이 동생의 그늘에 가려져서 나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큰 오라버니도 키가 무척 컸다. 동생보다 한 뼘은 더 컸다. 셋이서 명동 거리를 활보하는 날엔 모두가 키다리 가족을 바라보노라 법석이었다. 김영태 시인은 연하장을 보낼 때마다 '키다리 가족이라고 하여 우리는 한바탕 웃곤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린시절 받은 상처를 만회할 때가 나에게 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무심치 않아서 나의 상처를 치료할 좋은 기회를 주셨다. 미국 이민 올 때였다. 부모, 형제, 친구, 친척,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참 좋겠습니다. 미국사람처럼 키가 커서 대우받고 살겠습니다.” 나는 이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를 주었는지 어릴 때 놀림당하였던 소외감이 삭 가시고 이제 내 세상 만나서 미국생활이 신바람 나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 놀림당하였던 아픈 추억들이 말끔히 가시고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어서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졸업 사진에 옆에서 함께 찍었던 남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나를 복도에서 노래를 불러가며 손뼉을 치면서 놀려대든 남학생들도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이제 고희를 넘긴 이 나이에 오래되 빛바랜사진을 들여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즐거움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갈색의 머리칼에도 흰 살구꽃이 피고 그 곱던 피부도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하고 키도 척추 뼈 사이 물렁뼈가 작아지면서 그 큰 키가작아지고, 두 다리 지팡이도 휘청거리고…….
그 옛날 놀림 받던 시절이 그래도 좋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추억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가련다. 반세기 전에는 키 큰 것이 싫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외손녀를 볼 때마다 키 크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 그동안 이렇게변화가 오다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발, 은혜야 키 좀 커 거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오르는 삼나무(Redwood)처럼. 이 할미의 간절한 소원이다.
위의 그림은 나의 수필집 '늘 추억의 저편' 표지 그림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