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동행할 분들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남자 세 분은 모두 국어 선생님과 대학 입학 동기생들이라 하였으니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선배님들이었다. 그 중 국어선생님과 좋아하는 분을 알아차린 것은 버스를 타자마자 주저없이 함께 자리함을 본 때였다. 또 다른 여자분도 나의 대학 3년 선배인 같은 학교 생물 선생님이었다. 반가와 하며 버스에 올라타는데 한 남자가 내게 자리를 권하였다. 이끌어주는대로 앉아 그 하루가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원주의 삼학산이었다. 경춘가도를 따라 코스모스 활짝 핀 가을을 만끽하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등산이 시작되며 자연히 '김병일'이라고 소개한 아저씨(?)와 앞뒤로 걷게 되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세심하게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고 때때로 힘든 오르막에선 손잡아 도와주며 배려하였다. 잠깐 쉬는 시간에는 발 아래 보이는 '의암댐'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며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일깨웠다.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여겨져 싫지 않았다. 나의 마음도 조심스럽게 이끌리는 것 같았다. 산 위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이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부터 쌓였던 답답한 가슴을 한바탕 휘저어 날아갈 듯 가벼운 기분이었다.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는 기차를 타기로 하였다. 그 때까지 시간여유가 있어 당시 국민 스포츠였던 탁구를 치기로 하였다. 복식게임을 하기로 되었는데 한 팀은 정해진 짝이었고, 나는 김병일씨와 한 조가 되었다. 대학시절 나는 꽤나 탁구를 많이 쳤으므로 자신이 있었고 그도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팀이 엄청난 실력차로 승리하였다.
일 주일 후 우승 기념 만남을 약속하고 늦은 밤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도록 서울로 돌아왔다. 피곤하였지만 마음은 푸근했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하루 종일 돌보아 주어서일까. 그냥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한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 많은 부유물을 품고있는 듯한,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조용한 인상이었다.
월요일 아침 첫 시간은 애국조회라서 운동장에서 기나 긴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는다. 학생들은 줄 맞춰선 채로 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교무실로 돌아오니 어제 만난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메모가 있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다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나 김병일인데 어제 즐거웠어? 집에 잘 들어가고?"하는 것이었다. 어쭈, 반말로? 순간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지만 하도 짧은 시간에 쏟아놓은 말이라서 미처 반박할 기회를 놓쳤다. 퇴근 후 만날 것을 청했고 그날 이후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 할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 중 특별한 만남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크나 큰 축복이요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기회라 생각한다. 남편을 만났을 당시 돌아가신 엄마를 늘 가슴 속에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혼자 되신 아버지는 딸만 넷인 우리 집에서 세 언니의 결혼 후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몇달 전 간 수술을 하신 몸조리도 도와드려야 했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특히 겪어야할 어려움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내겐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이도 보통 복잡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그에겐 홀어머니와 네 명의 동생들이 있었는데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내 삶의 하나 뿐인 고귀한 선물은 화려한 포장지 속의 값진 보석,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 전설 따라 삼천리 >
김시동... 원래 그의 이름이다. 얼마나 촌스러운지 처음 듣고는 웃음이 터졌다. 항렬에 따라 대학 입학 후부터 김병일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단다. 많은 이북출신의 사람들이 새로운 호적으로 등재하던 때였다. '씨동'이란 말이 황해도 사투리로'씨가 될 아이'란 뜻이라 했다.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일곱 번 째 아기. 그의 엄마 백씨(어려서 헤어져 엄마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였다)는 시집 와 계속해서 아들만 여섯을 낳았다. 모두가 좀 클만 하면 홍역에 걸리고, 백일해로, 또는 원인 모르게 다 죽고 말았단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께서는 홧병으로 돌아가셨다니까. 일곱번 째 아이인 남편을 잉태한 다음 동네의 유명한 무당이 굿을 하며 '이번에 아들을 낳을 터인데 에미를 바꿔주지 않으면 또 죽을 것이니 아이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더란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을 줄 수가 없었다. 태어난 아기를 씨앗 말리는 바구니에 올려놓고 제발 집안의 씨가 되기를 빌고서 이름을 '씨동'이라 부르며 그 엄마는 아기에게 손도 대지 못하도록 길렀단다.
마치 전설 속에서 듣는 이야기 같았다.
운명이었을까. 육이오 전쟁 후 삼팔선을 넘어 강화도 북쪽의 조그만 '교동'이란 섬에 아버지와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서 살림살이 정리하여 내려오마던 엄마와 생이별을 한 것은 그의 나이 네 살적이란다. 행여 그 휴전선이 다시 열릴까 기다리던 세월 속에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고 학교갈 나이가 된 아들을 이끌고 아버지는 서울로 옮아온 후 다시는 남편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그저 아득한 엄마의 존재를 가슴에 품고 막연한 그리움으로 살아 왔다. 아버지는 재혼하여 이복 동생이 네 명이나 생겼고 옛 무당의 예언대로 에미가 바뀐 운명 속에서 그는 자라났다.
정말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늘 혼자였기에 말을 안한 것 같다. 나와는 정 반대의 기질을 가진 성격처럼 보였다. 어쩌면 서로 많이 다른 부분들이 우리를 엮어주는 이음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계모와 이복동생들과 어려운 삶을 살아왔음과 달리 나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왔다. 적어도 엄마가 대학 신입생인 나를 두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세상에 어떤 부러움도 없었다.
카톨릭 신자인 나는 결혼을 할 때에도 교회법에 따라야 했다. 같은 신자라면 문제가 없지만 신자가 아닌 배우자와 성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알고 보니 그이는 대학 일학년 때에 학교에서 카톨릭 영세를 받은 것이었다. 서강대학교에는 대부분의 예수회 소속사제들이 교수로 계시며 예수회의 미션인 교육에 몸바치셨다. 그의 눈에 훌륭한 분들이 존경스러워 보였고 그분들이 믿는 종교를 자기도 따라보고 싶었단다. 호기심으로 갖게 된 형식적이고 이론적 신앙이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혼배성사를 받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 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내겐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축복이라 여겨져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1975년 11월8일,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부부로 태어났다.
<함께 걸어온 길 >
서로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만난 우리는 정말 어느 한 편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았다. 나는 학교에 열심히 근무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또 아버지는 우리 두 아이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키워 주셨다. 맞벌이의 한 몫은 시댁의 생활비와 동생들 교육비로 쓰여졌고 그 결과 네 동생 모두가 대학교육까지 잘 마쳐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미국에 올 때도 아버지와 함께였고, 여든 아홉의 연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25년의 세월을 남편의 배려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었다. 때론 나보다 더욱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들었다. 나의 아내가 귀하면 그 아버지 또한 고마운 분이라며 힘들어도 참아내던 착한 사람.
대학 졸업 후 그이는 무역회사에 줄곧 근무해왔다. 우리 나라가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고 수출은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 우리가 살 길은 수출을 통한 외화획득이었고 여기에 누구라도 서슴없이 수출역군의 몫을 담당하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남편은 항상 무역부서에서 일하며 해외로 출장가는 일도 많았다.
뉴욕 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미국에 온 것이 1980년이었다. 당시는 외국여행의 자유화가 되기 전이어서 우리는 무척 흥분했다. 나는 7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세 살과 백일된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 후 엘에이 지점으로 이동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발령을 받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가 머물게 되었다. 3년 여의 주재원 생활이 편했던 탓인지 한국에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아이들의 언어와 교육,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이웃과의 극심한 경쟁과 비교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내가 교직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쉽지 않았다. 일찌기 결혼과 함께 미국에 온 언니를 통해 초청이민 비자서류를 미리 갖추어 놓았던 우리는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미국땅을 밟았다.
회사일과 학교생활이 전부였던 우리 부부에게 이민자의 미국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주재원 시절을 경험했기에 사회적응에 큰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생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흔히 미국 이민오기에 나이가 젊은 것, 영어가 유창한 것, 아니면 많은 돈을 가지고 오는 것 중 한가지 만이라도 갖춘다면 적응이 쉽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어느 하나도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돈을 많이 싸들고 오지도 못했고 영어 의사소통은 되는 편이었지만 전문직을 가질 기회는 없었다.
음식 장사만 고집하는 남편과의 다툼이 끝없이 이어졌다. 결혼 후에도 살림이라곤 몰랐던 내게 음식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몹시도 두려운 일이었다. 남편처럼 민첩한 구석이 전혀 없는 파트너와 함께 장사를 하면서 불 보듯 뻔하게 겪을 충돌을 피해갈 자신도 없었다.
마냥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우리는 밸리에 있는 작은 패스트후드 가게를 인수하여 11년 동안 삶의 터전으로 일궈왔다. 그곳은 우리 가족의 꿈이었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샘이었다.
거의 하루 24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우리 부부가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어찌 그 긴 시간을 용케도 견디어 왔는지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캐시어도, 쿡도 도와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 패티오에서 숙제도 하고 가족사랑을 키웠다.
이민세대인 부모의 삶의 현장에서 미국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항상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어른공경의 예절도 솔선했다. 덕분에 한글 쓰기는 능숙하지 않지만 읽기와 말하기, 특히 존댓말은 거의 완벽하게 구사한다. 아이들이 성실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했다. 카톨릭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고 우리의 힘으로 부족한 모든 것들을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았다.
가게를 팔고 난 다음에는 우체국 근무로, 어린이학교와 애프터스쿨을 운영하면서 우리의 젊은 날은 다 흘러가고 말았다. 둘이 함께 지나온 길,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마감시간에 늦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고 서로의 부족한 틈을 메꿔주며 뿌리내리기에 애써왔다.
힘겹게 지고 온 삶의 멍에들, 앞에 놓인 표적에 시신경을 모으며 전속력으로 달아왔다. 이젠 달음질하던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점점 도착점이 가까와지고 완주의 테잎을 끊으면 자유의 날개짓으로 솟구쳐오를 줄 알았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등의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푸른 하늘의 한가로운 구름 위에 미소를 얹어 너울거리는 세상을 떠다니고 싶었다.
거기에는 행복이, 평화가, 축복이 머무르리라 기대했었다. 그땐 저 끝 모퉁이 돌아서에 그토록 큰 강물이 흐르고 있는 줄을 몰랐다. 혼자서 헤엄쳐 건너기에는 너무도 깊고 물살이 빠른 그런 강.
우리 외손자 '탐'의 돌잔치 날이었다. 로스쿨에서 만난 백인아이와 사랑을 키우고 법대 졸업 후 둘이 다 변호사가 되어 결혼한 큰딸이 낳은 손자다. 그즈음 우리 부부는 세상의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으려 노력은 했지만 항상 우쭐대는 마음은 감출 수 없었던 듯 하다. 모든 이민자 부모의 삶이 그렇듯 고통과 절망의 벼랑에서도 성공한 자식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견뎌올 수 있었다.
미국과 한국이 반반 섞인 아이,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자를 우리는 '하이브리드 베이비'라 불렀다. 미국이름은 '탐 빈포드'였지만 우리는 한국이름으로 '김준영'이라 지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함께 익히며 자라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었다.
한국에서 주문해온 도령한복을 입히고 한국식 돌잔치로 꾸몄다. 사돈은 한복을 입히는 순서부터 우리의 잔치 풍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돌상에서는 사위의 예측대로 수저를 덥썩 집었다. 평생 먹고 살 걱정없는 팔자일 거라며 모두가 즐거워했다. 우리 생애에 기억될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달 말경 남편은 정기 혈액검사를 다녀왔다. 전립선에 이상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일주일쯤 후였다. 그로부터 숨가쁘게 검사실과 병원을 오갔고 결과는 전립선암이었다.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된 말기상태라는 것.
보통은 빈뇨 또는 고통을 느끼는 자각증세가 있다던데 그이는 웬만한 변화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옛말에도 병은 자랑하라고 하지 않던가. 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같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라' 라는 동물은 갑자기 놀라면 머리를 몸통 속으로 집어넣어 스스로를 보호한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으면 아무런 반응을 못한 채 자신의 머리가 그대로 나와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단다. 나 역시 무엇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넋나간 채로 시간만 흘리고 있었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겠는가. 행여 가족들에게 고통을 더해줄까 겉으론 평온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너무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그이는 이젠 바쁜 일손을 놓고 좋아하는 여행을 많이 다니자고 했다. 손자녀석이 조금 더 자라면 도서관에 데려가 함께 책읽기와 숙제를 도와주고 싶어했다. 작은 행복, 평범한 소망을 꿈꾸었지만 그것을 붙잡기에 현실은 너무 잔인했다.
모든 일에 나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편은 정신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가 최선으로 노력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였다. 가능한 치료의 단계를 담당의사와 의논하고 충실히 따르는 열심을 보였다. 규칙적으로 복용하는 약을 넘길 때마다 그이는 육신의 고통을 넘어 부서지는 마음의 절망을 함께 삼키는 듯 했다. 암을 미워하지 않고 함께 동행하며 달래고 다스렸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섭생과 마음의 평화유지를 위해 온 정성을 다했다. 용기를 북돋아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끝없이 해주었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와 함께 살아오는 동안 미처 고백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용서도 빌었다.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힘껏 버텨주기만을 바랬다.
거의 2년에 이르도록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손쓸 수가 없었다. 여린 삶의 끈을 붙잡고 무던히 견디어왔던 그이도 처절한 손마디를 늘어뜨린 채 호스피스를 받으며 떠남을 준비하였다. 아름다운 이별을 예비하며 우리가 모르는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에 머물다 본향으로 돌아갈 여정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끝까지 의연했고 담담했다. 너무도 차분한 그가 미웠다. 차라리 울분이라도 터뜨리면 함께 울겠건만. 나는 울음을 삼켜가며 그를 지켜봐야 했다. 오히려 남겨놓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평화를 빌어주었다. 살면서 수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 와 나이 육십을 살았으니 감사하다며.
2008년 윤년 2월의 마지막 날 아침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그는 그렇게 떠났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혼자서 간 것이다. 3월5일, 그가 예순 두 살 되던 생일에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영원히 잠들었다.
나 없는 그의 천국에선 누가 친구되어 줄까.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그토록 보고파하던 엄마를 만나 어리광을 부리며 행복하려나.
< 들리지 않는 울음 >
인간의 삶이 얼마큼인가. 태어나 성장하고 비로소 사람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식도 익혀야 하고, 교양도 갖추어야 함은 물론 사회적응능력도 키워야 올바른 대접을 받는다. 내 나이 곧 육십에 이르는데 요즈음 환갑이야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가. 단지 이제 오랜 내 인생의 동반자, 아니 나 자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남편을 하느님께 떠나보내고 외로움 속에 살아간다. 좀 더 당당하고 싶고 누가 뭐래도 강해야겠는데 자꾸만 속으로 움추려드는 나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 인간에게 가장 큰 충격이 배우자의 죽음이라더니 애써 감추려 해도 어깨가 처짐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 모습을 보면 그가 실망할텐데. 나의 활기차고 명랑한 밝은 모습이 너무 좋다고 했는데. 자기가 늘 혼자이고, 외톨이처럼 책과의 대화만이 유일한 기쁨이었다던 그이. 하루 종일 열 마디 말도 하지않는 대신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즐거움으로 산다고 말했던 그였다.
젊은 날이 마냥 좋았던 것 만은 아닐지언정 너와 나 구분없이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던 인생길의 친구였음은 분명하다. 성격이 다르고 생각과 판단에도 차이가 있어 부딪히며 반목한 세월도 많았다. 때론 남만도 못하다 느껴져 엄마를 부르며 목놓아 운 적도 있었고 우리의 만남이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며 실없는 울분을 삭히느라 잠도 설쳤다. 삼학산 등산에 초대한 선생님도 원망했다.
그는 따뜻한 아빠였고 손자를 바라볼 때면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같은 할아버지였다. 먼 산 너머 서러움을 보내고 한평생 안으로 눈물 삼키며 살아온 것을 나도 잘 몰랐었다. 남편 떠난 뒤에야 참아내던 슬픔이 내게 큰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음을 깨닫고 아쉬워 한다.
<홀로 아리랑>
새벽별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어두움 밝히던 밤길에서 떠오르는 태양에게로 자리를 비워주는 때문이리라.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그 삶을 누린 후에 홀연히 그림자만 남기고 아름답게 떠나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오늘도 나는 스스로의 충실한 하루를 약속한다.
그이가 떠난지 2년이 흘렀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산 사람은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사랑함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슬픔,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은 서러운 눈물이 되어 골짝을 지나고 강둑을 넘는다. 쓸쓸한 바람타고 내리는 겨울비가 빈 마음에 흘러넘치고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영혼이 한줄기 빛 조차 없는 눅눅하고 우울한 가슴으로 차가운 빗속에 서성인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리라.저 무지개 너머 사랑찾아 그가 있는 곳으로 떠나가리라.
혼자 머물러야할 시간이 너무 길지 않다면 좋으련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