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처럼 살고 싶다

                                                                                                                                                               유숙자

날씨가 우중충했다. 선뜻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였는데 걷기에는 좋을 것 같아 동네 몇 바퀴 돌고 왔다. 집 앞에서 숨을 고르고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어디선가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들려왔다. 트란도트 3막의 아리아,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이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주차하고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High b까지 오르는 힘찬 마지막 음절 '빈체로 빈체로~'(승리하리라)가 끝났을 때는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숨을 죽인 체 꼼짝할 수 없었다. 다시 노래가 이어졌다. 계단에 주저앉았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순간, 갑자기 미망에서 깨어서 빛을 본 것 같은 체험이었다.

남자 혐오증이 있는 공주 트란도트는 얼음 같이 차지만 매력 있고 아름답다. 전쟁에서 패하여 나라를 잃은 칼라프 왕자에게  3가지 수수께끼를 내고 푸는 장면이 이 오페라의 핵심이다. 수수께끼를 다 푼 칼라프 왕자가 트란도트 공주에게 자기 이름을 맞혀 보라는 문제를 내놓으며 너무도 유명한 아리아 'Nessun Dorma'를 부른다. '공주는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나는 공주를 차지할 것이다. 아침이 밝으면 내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칼라프가 승리를 확신하며 부르는 영웅적인 아리아이다

 

파바로티가 Torino 2006 Winter Olympic Games Opening Ceremony에서 생애의 마지막으로 불렀던 아리아가 Nessun Dorma이다. 그 장면이 눈에 어른거린다. 1년 후면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련만 그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답고 열정적인 음성으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검은 망토를 입은 그의 등 뒤에선 성화가 불타고 있었다. 몇 분이나 계속되는 환호를 두 손 모아 함박웃음으로 답례하던 세기의 성악가. 그가 지금 낯선 차 안에서 열창하고 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긴장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 음악이 끝났다. 그의 영혼의 심연에서 울려 오는 가장 숭고한 소리가 내 주위를 감돈다.

차에서 20대 후반의 멕시코 청년이 나왔다. 요즘 세상에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여 차에서 감상하는 친구가 있다니. 그것도 연거퍼. 나에게 크나큰 선물을 안겨준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발트뷔네 콘서트에서 라단짜를 열창하던 멕시코 성악가 Rolando Villazon을 똑 닮은 키가 훤칠한 미남이다. 그날 길에서 우연히 들었던 파바로티. 그를 체험한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 잊히지 않을 살아 있는 감동이었다.

 

발트뷔네(Waldbuhne) 콘서트를 관람한 적이 있다. 발트뷔네는 베를린 교외의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에 있는데 발트(Wald=숲), 뷔네(Buhne=무대) 라는 말 그대로 숲속에 설치된 야외무대다. 2만2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독일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1990년 6월 30일에 이 발트뷔네 야외음악당에서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로 베를린 필이 여름밤 공연을 열었다. 그때 이후 날짜가 매년 6월 마지막 주 일요일로 고정해서 피크닉 콘서트를 개최한다. 픽크닉 콘서트란 말에 어울리게 관객들은 캐주얼 차림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와인잔을 기울이며 연주를 즐기는 것이 LA Hollywood Bowl과 비슷하다.

발트뷔네는 황혼이 장관이다. 서서히 빛이 잦아들며 변하는 노을과 나무의 실루엣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밤으로 빠져들며 숲속 풍경은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관객은 미리 준비한 불꽃을 하나둘 켜기 시작한다. 연주가 고조됨에 따라 불꽃이 파도처럼 너울대고 음악과 불꽃과 검은 숲이 한데 어우러져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하고 발트뷔네의 관중은 연주와 하나 되어 인간 물결을 이룬다. 이곳은 연주도 좋지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것으로 더 유명하다.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공연은 2006년 '발트뷔네 피크닉 콘서트’다. 2만여 관중을 열광시킨 이 콘서트’는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마르코 아밀리아토 (Marco Armiliato)가 베를린 도이치 오퍼 오케스트라((Orchester Der Deutschen Oper Berlin)의 지휘를 맡았다. 독일월드컵 개막식 이벤트 콘서트로 플라시도 도밍고, 안나 네트렙코, 롤란도 빌라존이 무대를 장식할 성악가로 선정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오페라계의 황제 도밍고가 30대의 두 성악가 못지않은 가창력과 여유로 관록 있는 무대를 보여 주었다. 도밍고와 네트렙코는 오텔로 중에서 이중창 ‘밤의 정적 속으로 소란은 사라지고(Gia nella notte densa)’를 불러 관중을 사로잡았다.

'소란으로 성난 내 마음은 당신의 품에서 평화와 고요한 안식을 찾네. 노여움 뒤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면 세상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네. 나의 훌륭한 용사여 지독한 고통과 한숨과 바람이 우리의 기쁜 만남을 방해해 왔습니다. 힘겹게 고생했던 내 이야기에 당신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눈물로 적셔졌고 당신의 입술은 한숨을 쉬었소. 그것은 내 어두운 가슴에 빛을 비추었으며 하늘의 별과 같은 축복을 주었소.' 오텔로가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달빛을 받으며 부르는 사랑의 2중창이다.

한밤중에 남게 된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겪은 과거의 고통, 사랑이 피어나던 과정과 기쁨으로 충만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달콤한 사랑의 기억에 젖는다.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절절하게 혼연일체가 되어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았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흘렀다. 존경과 신뢰를 실어 열창하는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고귀하기까지 했다.

세월은 봄과 가을을 수없이 갈마들었으나 도밍고는 내가 런던 로열오페라 하우스에서 만났던 1983년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그의 머리에 서리가 살짝 내려앉았을 뿐.

 

Hollywood Bowl도 여름 공연이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해마다 이곳을 거쳐 간다. 야외공연을 즐길 때면 영국 '하이드 파크'에서 열창하던 파바로티가 그리워지고 발트뷔네 콘서트의 성악가들이 눈에 어린다. 영국에서 사는 동안 영국은 물론 바다 건너 유럽의 다양한 도시에서 오페라를 감상했는데도 음악에 대한 나의 목마름은 해갈 되지 않는다.

 

아! 유럽! 나의 꿈의 도시. 음악이 넘쳐 흐르던 공원과 거리와 콘서트 홀. 클래식을 공기에 품은 듯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도 귓가에 클래식 선율이 머무는 곳.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원 없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 시간이 머물러 주었던 곳.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그곳. 거기엔 내가 늘 그리워했던 풍경과 소리가 낭만처럼 흐르고 있다.

 

살아가며 음악으로 인해 행복한 때가 많았다. 좋은 연주를 관람하면 열광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음악이 나에게 불러일으켰던 감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환희와 비애, 감동만을 내 것으로 하여 즐겼다.

음악과 함께 살다가 간 사람들의 고뇌와 열정의 결정으로 탄생한 명곡들. 그들의 삶이 매 순간 음악이었던 것처럼 나도 음악을 벗하며 음악 속에서 음악처럼 살고 싶다. 우리의 영혼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 감명 깊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오페라를 감상할 때마다 그들의 영혼에 깃든 영감과 고통의 무게를 다시 한번 헤아려 보게 된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