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일까, 그는
유숙자
작년 11월, 추수 감사절을 사흘 앞두고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았고 다만 매그놀리아 열매를 밟았을 뿐인데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이 통증이 심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집으로 들어왔다. 부엌에는 추수감사절 만찬을 위해 사들인 음식 재료가 가득하다. 올해는 우리 식구 이외에 손님을 초청했기에 생각할수록 난감하다.
X- RAY 결과 발바닥뼈가 두 군데가 골절되었다. 깁스하고 목발을 짚고 나올 때까지도 실감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것이 현실임을 확인했다. 차고가 지하에 있으니 올라가야 하는데 나이 들어가며 소리 없이 불어난 체중을 알 리 없는 남편이 예전 생각만 하고 업히라고 등을 돌린다. 업혔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더 큰 일을 당할 것 같다.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죽기를 각오하고 업혔다. 아니 차라리 매달렸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남편은 한 손으로는 바를 잡고 한 손으로는 나를 받치고 거뜬히 올라가는데 나는 스스로 무게를 감당키 어려워 떨어질 것만 같았다.
수난이 시작되었다. 목발을 짚고 걷는 것이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윌 체어도 만만치 않았다. 본래 허리 디스크가 있는 나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야 윌 체어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발을, 그것도 한쪽 발을 쓰지 못하는 것뿐인데 온몸에 막대한 지장을 주어 삶을 엉클어 놓고 있다. 8주 후에 깁스를 풀 것이라 했으니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기 바랐다. 평소에 유수 같은 세월이라더니 시간도 공기도 늪처럼 고인다.
장영희 교수가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장 교수는 목발을 짚고 다녔다. 어느 날 은행 입구에서 밖을 향해 나가는데 때마침 뛰어들어오던 청년이 장 교수의 목발을 건드려 나동그라졌다. 장 교수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져 크게 다쳤다.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는 장 교수 곁에서 청년은 한사코 ‘목발을 조금 건드렸을 뿐인데’를 반복하고 있더란다. 장 교수에게 목발은 온몸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인데 그것을 건드려 놓고 성한 사람 생각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 청년이 괘씸하여 마음이 언짢았다. 이제 내가 목발에 의지하며 생활하자니 장 교수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연민이 스민다.
평소 운동신경이 발달 되었다고 자부했는데 걸을 때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고생했다. 부득이 외출해야 할 때 누가 내 주변을 얼씬거리기만 해도 불안하여 멈춰 섰다. 목발보다 몸이 앞서 나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친 발에 영향을 줄까 봐 온 신경이 집중되어 대책 없이 나동그라졌다. 깁스를 벗기까지 병원에 가는 것 이외에 외출은 엄두도 못 냈다.
자신이 경험해 봐야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안다. 전에는 목발 짚은 사람을 보면 ‘불편하겠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내가 목발에 의지하게 되니 두 발로 걷던 때의 무심했든 감사가 절실히 와 닿는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는 말이 설렘을 주고 때로 두려움도 주었으나 이제는 두려울 뿐이다. 예전에는 지키지 못할 계획이라도 야무지게 세웠었는데, 오늘 하루 충실히 살기 원하는 하루 단위의 인생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익명으로 카드가 왔다. 드가의 발레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로 고른 걸 보면 내 주변 사람일 것 같은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가사가 시 같은 대중가요 CD, 소설 등대지기도 보내 주었다. 연전에 가시고기를 읽었던 탓에 등대지기가 반가웠다. 지루한 시간을 보람있게 활용하라는 조언도 있었다.
‘옛날 발레를 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소중한 발인데. 무대에서 백조의 호수를 연출해 보이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발이 얼마나 자신에게 기쁨과 아름다움을 선사했는가? 그려 보세요. 관람객들의 환호 속에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세요. 그 환상이 눈에 어리지요. 이제 눈을 감고 옛 기억으로 들어가 다시 춤을 추는 겁니다. 아프고 힘들 때일수록 감사가 넘치고 세상이 선명하게 보인답니다.’
익명의 카드는 침체에서 나를 끌어 올렸다. 활력을 주었다. 기다림을 키우게 했다.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 아픈 것이 아니고 불편한 것, 지루한 것뿐인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음악도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에서 다소 완화되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공포여서 그림 같이 앉아 있는 것이 답답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카드의 주인공이 ‘누굴까?’ 하는 궁금증도 일었으나 내 불편함을 알고 위로해 주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는 것이 마냥 고마웠다.
10주 만에 깁스를 벗으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걷고 싶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가 길 따라 한없이 걷고 싶었으나 막상 걸으려 하니 발을 옮기는 것이 공포였다. 성냥 가지 정도의 나무만 봐도 겁이나고 장애물이 없는지 땅만 보고 걷게 된다. 당분간 이 습관이 계속될 것 같다. 작은 열매를 밟고 골절된 발, 그 충격으로 걷는 것에 노이로제가 되었다.
누구일까, 내 마음에 연둣빛 아지랑이로 들어와 아른거리던 사람. 지치고 침체한 영혼을 청정케 해주던 카드의 주인공이. 내게 오로라 같은 존재였고 엽록소 같았던 사람. ‘당신의 친구’라고 쓴 ‘나의 친구’께 감사드린다.
힘든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더욱 본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샘처럼 솟는다. 따뜻한 위로의 카드를 준비하는 일에 더 정성을 기울여야겠다. 충실히 살아야 하는 삶. ‘오늘은 오늘 하루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을 좌우명 삶으리라.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