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공평한 것

유숙자

큰아들 내외가 결혼 5주년을 맞았다.

아들 내외는 5주년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는지 우리를 초대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정성껏 꽃바구니를 만들었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연 분홍색 장미를 아들과 며느리 나이만큼 담았다. 예쁘고, 소담하고, 풍성했다. 꽃바구니가 흔들릴까 봐 연방 뒷좌석을 돌아보느라 목이 뻣뻣해도 즐겁기만 하다. 아들 집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설렌다.

 

미션비에호 아들 집 주변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동네가 조용하고 넓은 공원이 많아 산책하기 좋다. 싱싱한 연초록의 잎사귀들이 도심에서 자란 나무와 빛깔이 다르다. 바람도 녹색을 띠었는지 어딜 봐도 푸르다. 2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나 지금이나 아들 집 문 앞에 서면 기도가 절로 나온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주신 분께.

 아들 집 거실은 넓고 시원하다.

음계처럼 늘어져 있는 커튼과 벽에 걸려 있는 한 쌍의 도자기가 장식 전부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상케 하는 용사가 그려진 도자기. 영국 살 때  앤티크 박람회에서 산 것인데 거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 중이었을 때 집안에 도둑이 들어 눈에 보이는 물건은 모두 가져갔기에 안쓰러워 걸어준 그림이다.

오랜만의 방문인데 별로 변화가 없다. 음악 시스템만 조금 갖추었을 뿐. 앰프와 음반을 다 잃고 무척 서운했을 텐데 쇼팽이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다. 아들은 쇼팽을 무척 좋아한다. 오래전 학기를 마치고 집에 와 있을 때였다. 간식을 들고 방을 노크했는데 쇼팽이 흐를 뿐 기척이 없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아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음악의 볼륨을 낮췄다. 눈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아름다운 시정과 정서가 어우러지는 프렐류드 15번이 방울져 내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로스트 비프 구워지는 냄새가 허기를 부른다. 소곤거리며 뭔가를 준비하는 아들 내외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기 좋다. 이 집에서는 말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속삭임만 있을 뿐이다. 말러의 교향곡이 오후의 고요 속에 잠긴다.

 

6년 전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준비해서 만들어 놓은 음식들, 식탁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공연히 분주하다. 공항에서 이미 도착을 알렸고 집에 들러 짐을 부려 놓고 오겠다고 한지, 세 시간이 지났다. 불안해서 연락해볼까 망설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우리 집에 와주셔야겠어요.” 음성이 지나치게 차분하다.

“왜 아직 안 떠났어. 무슨 일 있니?”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가슴이 두 방망이질 한다.

“도둑이 들었어요. 우리가 여행 간 사이에---.” 전화기를 든 손에 힘이 빠진다.

코스타메사에 둥지를 튼 아들 내외는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집 안팎을 꼼꼼하게 챙겼다. 2주간의 크루즈 여행이기에 저녁이면 시간에 맞춰 등이 켜지도록 해 놓고 현관과 창문에 특수 보안장치를 했다. 알람을 부착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는 친구 말이 이제껏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여 그만두었다. 이따금 집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으나 ‘알았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가지 않았다. 왕복 120마일이 넘고 남편 퇴근길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시간대는 교통 혼잡이 심하다.

 

아들 집으로 향하는 길고 긴 시간 동안 가슴이 너무 아파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생긴 일 같다. 누군가 난입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보금자리를 휘젓고 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도둑이 들었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주관하에 달렸음을 평소 굳게 믿는데 그런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인생은 불공평한 것. 그것에 익숙해져라. (Life is unfair. Get used to it )”는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 없다.

 

아들 집에 도착하니 실내가 몹시 어질러져 있었다. 집을 돌봐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아들 내외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바람조차 건드리지 않는 정적이 잠시 흘렀다.

여행에서 돌아와 열쇠를 넣고 돌리려는 순간 문이 스르르 열리더란다. 얼마나 놀랐을까. 기가 막혔을까. 남가주 11월은 우기의 시작이다. 아들 내외가 크루즈를 떠나고부터 폭풍을 동반한 비가 무척 많이 내렸다. 코스타메사 그 동네는 나무가 많고 아들 집 정원에도 큰 나무가 몇 그루 있어 외부에서 보면 집이 반 이상 가려진다. 도둑은 그것을 이용한 것 같다. 테라스의 대형 유리문이 통째로 뜯겨 있었다. 견고하게 만든 창틀이라 뜯어내기 수월치 않았을 텐데 빗소리를 이용한 것 같다는 경찰의 견해란다. 테라스로 들어와 현관으로 당당하게 나갔다.

 

늦게 결혼을 한 아들은 집을 떠나 혼자 살던 10여 년 동안 제법 살림을 갖추어 놓았다. 음악을 좋아해 앰프의 질을 높였고 수백 개의 6~70년대 싱글 앨범과 LP는 오랫동안 수집한 것으로 영국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음반들이다. 그 외에 손때가 묻어 있는 가구와 소장품들이 사라졌다.

언젠가 아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쉬운 것이라고. 살아가며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으냐고.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없고 진실과 희망에 값을 지급할 수 없다고. 그런 신념으로 살아가기에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더 나쁜 상황으로 치닫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다. 허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비롯해 서재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이 그나마 손을 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신혼이기에 품을 수 있는 꿈이 있었을 것이나 자신들의 현재 위치에서 그것을 초월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인생의 여백 속에 있는 어려움을 일찍이 체험했던 때문일까. 꿈에 부풀어 서둘러 가던 발걸음이 진지하게, 사유하는 삶이 되었다. 이런 아들 내외의 모습이 무척 여유 있게 돋보였다.

 

은은한 호박 빛 촛불이 정다운 대화를 나누듯 너울거린다. 삶의 향기가 맑고 싱그럽게 피어난다. 축하와 감사의 기도가 이어진다. 잘 구워진 로스트 비프에 욕셔 푸딩이 입맛을 돋운다. 첫 만남이었을 때처럼 발그레 상기된 아들 내외의 표정이 보기 좋다. 오늘 결혼 5주년을 맞는 이 가정, 감사하게 보낸 시간이 꿈과 기도로 잘 가꾸도록 시인의 염원을 나의 소망에 담는다.

 

언제나

쉼 없이 흐르게 하소서.

 

맑은 물이 고여 시냇물이 되어 흐르고

강물이 되어 바다를 이루게 하소서.

 

한마음으로 있으나

변화와 새로움으로 출렁이게 하소서.

 

아름다운 마음과 따스한 시선으로

모두의 마음 감동의 강물이 흐르게 하소서.

 

고운 선율 속에

영혼의 기쁨과 환희의 물결이 넘치게 하소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