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그리다
유숙자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촛불처럼 타고 있는 음악이 있다. 아트 채널(Arts Channel)의 음악이다. 다양한 장르의 클래식 음악과 발레,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어 콘서트홀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때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예술가들의 궤적을 더듬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를 실감케 한다.
많은 레퍼토리 중 으뜸은 뮤직 비디오다. 발레나 연주는 DVD를 구해서 볼 수 있으나, 뮤직 비디오는 음악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운 영상을 담았고 예술 감각이 뛰어난 유럽의 건축물, 유적,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삼았다. 동유럽이나 북유럽은 우리 눈에 익숙지 않은 고장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앉아서 감상하며 누릴 수 있는 여행의 호사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뮤직 비디오가 성행했는데 내가 처음 본 것은 1981년 영국에서다. 그때의 경이로움을 나는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아, 진작에, 진작에 저런 뮤직 비디오를 볼 수 있었더라면.’ 하고 탄식했을 정도다. 그것은 오래전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미술 전시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어린이들의 황당했든 경험을 떠올렸던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뮤직 비디오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다. 중학교 음악 시간에 비로소 감상을 곁들인 이론 공부를 했던 나는 음악과 그림이 하나라는 발상을 알지 못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매년 ‘세계 어린이 미술대회’가 열렸다. 여러 나라에서 출품된 그림을 국제심사위원들이 개최국에 모여 작품을 심사하고 상을 주었다.
어느 해였나, 프랑스가 개최국이었다. 예술의 도시라 차별화된 방식을 택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해에는 출품된 그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 와서 직접 그리게 하는 주최 측의 요청이 있었다.
국외 현지에서 행사가 치러지느니만큼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겠으나 어린 미술가들이 보호자와 함께 속속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당일 집합 장소는 파리 근교의 쏘 공원(PARC DE SCEAUX)이었다. 쏘 공원은 인공적인 정성이 가미된 비경으로 파리 외곽 남쪽의 세 지역(SCEAUX, ANTONT, CHATENAY – MALABRY)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공원이다.
숲과 오솔길, 연못의 분수가 아름다운 곳. 일정한 높이로 전지되어 있는 나무. 세모, 네모기둥으로 다듬어 놓은 나무들이 대칭으로 늘어서 있다. 사열하듯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미루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물에 잠긴 나무의 그림자가 꿈속 같다. 많은 손길을 통해 품위 있게 만든 공원이어서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이 있다. 어린이들이 여유 있게 도착하여 공원을 구경하고 그림도 구상하며,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배경을 보며 뭔가를 노트하기도 했다. 공원이 원체 수려하여 앉아 있기만 해도 어떤 구상이 톡톡 튀어나올 것 같다.
대회가 열리는 아침, 어린이들은 눈망울을 초롱이며 심사위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사위원은 어린이들을 박물관 앞 광장으로 안내했다. 넓은 잔디 양쪽 가에는 보초병 모양의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어 운치를 더했다. 어디 선지 생기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여러분, 이 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풍경을 2장의 그림으로 그려 보세요. 시간은 충분히 드릴 겁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경악할 노릇이었다. 아니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라니 이런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음악을 듣고 어찌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서구권 아이 중에는 음악을 들으며 침착하게 스케치하고 채색으로 이어 가기도 하고 같은 서구권이라도 하늘만 쳐다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연필만 물고 있다가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결국, 주최 측이 요구하는 그림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그날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과 가을이다.
무더운 여름, 더위에 지쳐 사람이나 짐승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활기를 잃고 나른해진다. 숲에서는 뻐꾸기가 울고 산비둘기가 화답하듯 노래한다. 쉬고 있는 농부들,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부는가 싶더니 갑자기 북풍이 몰아친다. 하늘엔 천둥과 번개가 일고 우박이 내려 풍성했던 농작물이 망쳐진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을 맞아 춤과 노래가 온 마을을 들뜨게 한다. 술 취한 주정꾼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라르게토의 솔로 바이올린으로 연주된다. 춤과 노래가 기쁨을 더해주고 잔잔한 산들바람은 사람들의 기분을 더욱 즐겁게 한다. 잔치가 끝난 후 상쾌한 가을밤의 달콤한 잠을 표현하고 있다. 날이 밝자 팡파르를 울리며 사냥 장면을 묘사한다. 사냥꾼들은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간다. 짐승들은 도망가고 사냥꾼들은 뒤를 쫓는다. 현악기의 크레셴도는 개들과 사냥 도구가 내는 소음을 그려낸다. 짐승들이 저항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고 도망가다 지쳐서 결국에는 죽고 만다. 활발한 춤곡으로 음악이 끝난다.
“사계”는 비발디의 걸작 중 하나로 짧은 곡이긴 하나 내용이 뛰어나며, 아름다운 서정이 가득 담겨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한 내용의 음악이었으나 어린아이들이 그리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클래식 음악의 보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예능 실력이 출중하여 매 대회 때마다 금상을 휩쓸었던 우리 어린이였건만,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껴 표현하고자 하는 주최 측 의도에 미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청각 교육을 철저히 받은 유럽의 어린이들은 그만큼 상상력이 풍부했고 “예술의 도시”라는 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었음이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발디의 사계를 가장 잘 표현한 대조적인 두 연주자를 좋아한다. ‘예후디 메뉴인’ (Yehudi Menuhin)과 ‘바네사 메이’(Vanessa Mae)다.
메뉴인은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뉴욕에서 출생(1985년 영국 국적 취득)하여 4세 때 퍼싱어에게 사사했고 7세 때 샌프란시스코 관현악단의 독주자로 데뷔했다. 유럽에 진출하여 9세 때 파리 라무루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다. 귀국 후 12세 때 뉴욕 교향악단에서 베토벤을 연주해서 천재로 인정을 받았다. 연주를 마치자 아인슈타인이 무대로 걸어와 껴안고는 ‘이제 천국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감탄사를 토해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다가 어린 메뉴인의 음악을 듣고 의심을 떨쳐버렸다 한다. 믿을 수 없는 뛰어난 연주로 음악계를 경악시킨 바이올리니스트. 전통 클래식의 기법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연주는 기품이 있고 우아미를 더하며 고난도의 테크닉 연주도 섬세한 그만의 것으로 표현했다. 청중을 압도하는 어떤 위력과 여운이 오래 남아 한동안 그의 음악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비발디를 연주하던 메뉴인의 조각상같이 빼어난 용모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반면 메이는 평범을 벗어나 자유분방한 연주 기법을 택했다. 중국인 아버지와 싱가포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이는 린 아오지 교수에게 양켈레비치 테크닉을 사사하며 팝과 클래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네사 류’의 기법을 터득했다.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활을 그어대는 그녀의 몸짓은 질풍노도 같다. 그녀는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바이올린 테크노 어쿠스틱 퓨전(Violin Techno – Acoustic Fusion)”이라고 말한다. 현란하고 관능적인 의상으로, 전통적 클래식 장르에서 다소 벗어나는 연주와 몸짓이어서 몸 전체가 악기 같다. 천둥, 번개와 우박이 쏟아지는 영상을 배경으로 사용하여 발랄하고 거침없는 멋진 포즈와 잘 울린다. 그녀의 연주를 보고 있으면 그 독특한 분위기 속으로 청중을 빨려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음악은 온갖 예술 형태 중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마땅하다는 확신이 선다. 그 매혹스러운 순간, 도취의 순간에 나를 맡기면 춤이 되고 새가 되어 마침내 비상을 꿈꾸게 된다.
쏘 공원에서 들었던 비발디가 환청으로 어린다. 연초록 들판에 물살 무늬를 그리며 앉아 있던 어린 예술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우리 어린이들이 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 여름, 자연과 인공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원에서 푸른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음악을 만나며 가슴에 꿈이 담긴 집 한 채 짓고 왔으리라. 비발디가 물결치던 공원과 숲길이 가슴 저린 그리움으로 남아 있으리라. (2010)
*양켈레비치(철학자) 테크닉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육체로 죽는 것이다. 육체가 인간의 삶과 운명을 좌우하고 정신은 육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삶을 차지하는 비중과 그것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연주에 도입했다. 좋지 않은 테크닉이 주는 근육 문제를 없애 주는 부드러운 형식의 연주법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