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은 봄

(변해명 선생님 영전에)

유숙자

한 장 남은 성탄 카드가 외롭습니다. 갈 곳을 잃은 카드. 유난히 한기가 느껴지는 올겨울, 2012년이 저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신지 벌써 일곱 달이 지났어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서둘러 떠나셨나요. 봄이 되면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시집을 준비한다 하셨고 소설을 쓰고 계신다 하셨던 그 많은 일을 두고 어떻게 떠나셨나요. 편찮으시기 전 선생님은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문우회 일, 도봉 수필반, 그 외 청탁원고 등을 소화하시느라 한가한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계셨기에 일에 몰두해야 보람을 느껴 스스로 바쁨을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투병 생활을 하시던 18개월 동안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의연하셨지요. 삶에 감사가 넘쳤고 주어진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대화 속에는 연둣빛 희망으로 가득하셨습니다. 2010년 11월, 의사로부터 4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음에도 잘 견디고 계셨습니다.

이른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 상황이 잠시 꾸고 난 꿈이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셨을 테고, 늦은 밤, 잠 못 이루실 때 외로움과 우울함이 더 크게 다가올 때도 있으셨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끔 메일을 주셨지요.

 

'항암 주사를 맞고 첫날과 둘째 날은 많이 붓고 지치지만 이렇게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으니 정상이죠. 변한 것 아무것도 없어요. 많은 사람의 기도 덕인 것 같아요. 오늘내일 쉬고 나면 또 괜찮아져요. 그런 채널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 해요.'

 

'조금만 참고 견디면 유 선생 시상식 하는 행사장에 나가서 축하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보다는 다닐만했는데 왜 못 가고 말았는지 후회가 돼요. 아마 그때 받은 내 충격이 남과 더불어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간에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두고두고 미안할 뿐이에요.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며 지내요. 돌아보면 하느님께 참 감사하고 있어요. 참 많이 살았고 책도 많이 썼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났고, 행복한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더는 욕심 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하느님께 야단을 맞을까 봐요. 저는 지금 환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요. 잊어버려요.

 

'꽃들이 모두 졌는데 나는 겨울 스웨터를 입고 버버리를 걸치고 병원에 갑니다. 내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나 봅니다. 나으려고 아픈 것이니 참아야 하는데 요즈음은 참 많이 우울합니다. 암을 앓는다는 것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에요. 정신력이나 의지만으로 정상인 같아 보이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갈수록 실감하고 있어요.'

 

'이틀간 경주에 다녀왔어요. <동리 목월 문학관 특강> 3시간을 거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대중 앞에선 강의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 가도 문제였지요.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평안하게 강의했어요. 저도 놀라고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놀라고 내 오기였는지 결심이었는지 그 특강을 포기하지 않은 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1년 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으셨는데 위독하다고. 임종이 가까우신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려고 급히 서울엘 갔습니다. 2달여 머물다 서울을 떠나며 유일하게 산 책이 변해명의 <정바라기>였습니다.

1980년 한국을 떠났기에 그 작가가 생소했으나 한국식 문창 살이 그려져 있는 책 표지가 정겨워 집어들었습니다. 정이 그리워 정에 매달려 보낸 어린 시절과 정을 담아내고 싶어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미지 작가의 토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정바라기>는 한 권 책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의 인연으로 다가갈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2004년 선생님께서는 LA 해변문학제 강사로 오셨습니다. 처음 만남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조금씩 친분이 쌓였어요. 냉정할 정도로 침착하셔서 웬만해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마음 속 깊은 곳은 따뜻하셨어요.

 

2010년 겨울, 한국수필가협회의 행사에 참석하러 서울에 갔습니다. 이제 곧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쁨에 가슴설렜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004년에 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활기가 없으셨습니다. 점심 후 11월의 칼바람이 부는 인사동 거리를 걸었습니다. 함께 걸으니 좋았고 여기저기 민속 상품점을 구경시켜 주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제가 서울에 도착하기 며칠 전 이미 담낭암 4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신 때였습니다.

해마다 서울 방문을 권하시며 함께 여행하자시던 선생님은 담낭암이 간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안 되고 항암치료에 의존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무척 어려우셨을 시기인데 의연하셨어요.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에 오래 앉아 계셨습니다.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일어섰지요.


서울을 떠나기 닷새 전, 선생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외출하고 들어오는 길에 댁 근처에서 만나자고. 언니 집이 상계동이라 수유리를 거쳐야 하기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식사를 나누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지난번 뵐 때보다 더 기운 없어 보이셨습니다. 글 열심히 쓰고 수필집 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헤어질 때까지 침착하게, 용케 참으셨던 눈물을 택시를 타면서 보이셨습니다. 그 눈물은 평소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의 통곡이었을 겁니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다시 찻집으로 들어갔어요. 카메라가 있었건만 경황이 없어 사진 한 장 함께 찍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앉으셨던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뵌 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입니다.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전화와 메일을 끊겠다고 하셨으나 전화도 받으셨고 메일도 이따금 주셨습니다. 병상에서 방문객을 맞을 때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밝은 모습으로 긍정적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의연하게 투병하셨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3월 20일 병원에 가신다는 메일을 주셨습니다. 4월 16일 가냘픈 음성이 전파를 탔습니다. 그리고 더는 그리운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향기로운 문학 작품을 남겨 놓고 사장하기엔 너무 아까운 필력과 섬세한 감성을 안으로 접은 체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면 나의 뜰에도 봄이 오겠지요. 머지않아.” 그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아 우울하셨을 선생님. 천직인 글도 못 쓰고 텅 빈 날들로 남의 삶처럼 바라보고만 계셨을 선생님을 가슴에 품으며 슬픔을 가누고 있습니다.

수필 같은 삶을 사신 선생님.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도 희망을 잃지 않으셨기에 삶을 정리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떠나셨을 선생님. 사랑합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