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랑

                                                                                                                                                                유숙자

이른 아침 K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퉁퉁 부어 있는 눈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커피를 달라는 그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허탈함을 달랠 길 없어 달려온 것이려니 했는데 마음의 평정을 잃은 모습이다.

아들이 대학으로 떠나며 엄마의 동행을 거절했단다. 으레 세 식구가 함께 떠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아침에 갑자기 말을 바꾸더란다. 6시간의 주행 거리가 엄마에게 무리라며 한사코 아빠와 떠나겠다고. 아들이 괘씸하다 못해 분통이 터졌다. 10학년까지만 해도 입버릇처럼 ‘대학은 주말마다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정하겠어요.’ 하던 아들의 변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엄마를 밀쳐두고 떠났으니 아마도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을 것 같다.

 

7, 8월은 대학 신입생에게 황금 같은 여름이다. 평생을 통해 가장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이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되고, 자유를 향유 할 수 있어 좋고, 새로운 도전에 설렌다.

남은 자는 쓸쓸하다. 누군가 빼앗아 가버린 것 같이 텅 빈 가슴에 휑하니 찬바람이 인다.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 일렁인다. 더 사랑해 주고 관심 둬 줄걸. 후회가 줄을 잇는데 시간을 돌릴 수 없다. 자녀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부터 기실 부모 곁을 떠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졸업 후 그곳에서 직업을 갖고 배우자를 만나기도 한다. 부모가 보살펴야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K는 유학생으로 이곳에 왔다. 전문직을 가졌으나 결혼 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살았다. 폭넓은 전인교육에 치중한 보람이 있어 아들이 잘 자라 주었다. 그런 아들이 학년이 높아지면서 엄마와 대립이 잦았다. 그녀는 외로웠다. 삶이 서글프고 허무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들이 더할 수 없이 대견스러웠지만 그에 따른 의사 존중과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함을 고려하지 못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생각했다. 매사를 명령하고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을 아들 장래를 위한 정성으로 생각했다. 이해와 배려를 함께해야 하는 그 부분이 약했다. 드디어 어느 날, ‘나는 엄마의 규격품이 아니에요.’ 하는 아들의 절규를 들었을 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더란다.

 

프로스트는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이미 우리가 걸어온 과거 속에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라 했다. 아들은 11학년이 되면서부터 집에서 거리가 먼 대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그 뜻을 비쳤다.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자신의 의지가 전혀 존중되지 않고 엄마의 뜻대로 선택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엄마를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리움을 키우고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들은 자신의 장래 문제도 고려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아들에게 아빠가 용기를 주었다.

 

대부분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녀가 자라주기 소망한다. 마찬가지로 자녀도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만큼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자녀를 바라보는 눈이 관대하고 현명해져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하다. 일방적 강요는 마음을 닫게 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자녀에 대해 정성을 쏟되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서로가 편안하다. 하나의 인격체로 잘 키워서 사회로 진출할 때까지 보호막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마음가짐일 때 내적 평안함이 이루어진다.

 

어느 모임에서 큰아들이 발표한 말을 함께 참석했던 친구가 전해주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와 동생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몇 가지 규칙이 있었으나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게 두었다. 대학 진학도, 직장과 배우자 선택도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게 맡겼다. 부모님은 우리가 조언을 구할 때 함께 의논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해 주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매사를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며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학부 4년 동안 어머니가 자주 보내 주신 메일과 카드가 힘이 되었다. 부모님의 배려에 감사하다. 지금의 나는 부모님의 믿음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아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우리도 다른 부모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의견이 엇갈릴 때에 정면 충돌을 피했고 최대한으로 아이 편에 서서 생각했다. 의견을 충분히 들어 주고 이해해 주었으나 아니다 싶을 때는 표나지 않게 살짝 빗겨서 방향을 제시했다. 아이들은 신중하게 받아들였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편이었다. 우리 내외보다 더 이 사회를, 미국을 바로 알고 있기에 관망하는 쪽이었다. 자신들 의사에 맡겨도 비교적 잘해나갔다.

 

성탄절 즈음에 다니러 온 아들로 K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난 아들. 아들을 떠나보내고 말할 수 없이 힘들었던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있었던 K가 전과 다름 없이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흔한 말로 마음을 비웠다고나 할까. 그보다도 아들이 K의 마음을 한없이 부드럽게 보듬어 주고 떠났다는 후문을 들으며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치사랑을 보여준 아들이 멋져 보였다.

자녀 교육만큼 힘들고 어려운 것은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 농사라고 하지 않던가. 떠나고 난 다음에 후회하고 우울해질 것이 아니라 함께 지낼 때 사랑과 이해와 관용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녀가 한 계단씩 뛰어넘어 성장할 때마다 교량 역할을 해주는 임무가 바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래야 기대와 섭섭함이 적어지고 그리움만 산처럼 쌓이게 될 테니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