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첫사랑

유숙자

올가을은 설렘으로 맞았다.

여중 때의 담임 김효자 수필가께서 문학강연차 LA 오신 탓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강연은 듣지 못했으나 남쪽 바닷가 C 수필가댁에서 갖는 조촐한 송별모임엔 참석할 있었다. 생각보다 앞선 마음은 노란 개나리로 울타리 쳐진 모교 교정에 있는 나를 본다.

 

50 , 선생님께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로 부임하셨다. 조례 단상에 올라서신 선생님. 언제나 그랬듯이 여기저기서 별명이 튀어나올 법한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는 조선 시대 인물화에서 방금 걸어 나온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자태가 곱고 음성마저 나직나직한 동양미인. 별명은커녕 어느 학년, 어느 반을 맡게 될까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분이 나의 담임이며 국어를 담당하신 김효자 선생님이다.

 

부임하고 달이 지난 영광스런 별명이 붙었다.

‘10m 미인, 얼굴에 주근깨가 많았는데 거리를 두면 전혀 나타나지 않고 고우시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국어 시간은 숨소리조차 빨아들일 것처럼 조용했다. 선생님 강의에 빠진 나는 눈과 귀만 살아 있었다.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낭송해 주실 때의 촉촉한 음성 따라 나도 젖어있었다. 때로는 급우들의 성화에 이겨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영화마다 거의 학생관람 불가였기에 우리는 영화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그때 들었던 <나의 청춘 마리안느> 가슴으로 꿈을 꾸게 하는 영화였다. 선생님의 표현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상의 시였다. 뱅쌍을 소개하는 나레이션을 들을 때부터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뱅쌍 / 20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하지 /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속에 파묻힌 고성,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성을 떠오르게 하는 주문이지

 

하일리겐슈타트 교외 호반에 있는 산간기숙 학교에 뱅쌍이라는 학생이 전학온다. 잣나무 숲을 적신 음산한 물안개가 짙고, 호수 가운데 안개에 휩싸인 퇴락한 고성이 있는데 뱅쌍은 성에 호기심을 가진다. 어느 뱅쌍은 보트를 저어 성으로 간다. “유령의 이라 불리는 성의 창문은 언제나 닫혀있다. 그곳에서 뱅쌍은 운명처럼 신비의 소녀 마리안느를 만나게 된다---. 어느 사이 선생님은 마리안느가 되어 계셨다.

 

담임을 맡은 되지 않아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직장인 학교에서, 정을 쏟은 담임 반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은 선생님이나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아무 없이 종례를 칠판에 쓰고 계신 선생님의 어깨가 들먹거렸다. 청순해야 어린 학생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에 울고 계셨다.

 

다음 중학교 졸업식 , 대강당 피아노 위에 개나리꽃 아름이 놓여 있었다. 개나리가 피기 이른 시기인데 졸업식장은 노란빛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선생님은 정을 쏟으신 우리들의 졸업을 축하해 주시려고 꽃봉오리도 맺혀 있지 않은 개나리를 동안 정성을 다해 온실에서 키우셨다. 가슴에 사랑이란 이름의 노란 불씨 하나 심어졌다.

 

C 수필가 댁으로 들어서는 가슴은 방망이질한다. 연전에 엽서 내왕은 있었으나 실제로 뵙기는 졸업 처음이다. 뒤뜰로 내려서며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은 어느 분과 불빛이 명멸하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담소하고 계셨다.

선생님과 나의 반가운 해후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그곳에 계신 분들에게 나의 사랑이에요.” 하신다. 선생님의 모습은 세월만 살짝 지나갔을 , 자태, 음성, 미소, 가냘픔마저 예전 그대로다. 어둠이 깔린 너른 뜰에서는 가을을 연주하는 풀벌레 소리가 잠든 기억을 들추어 주었다. , 하늘의 별들이 몽땅 쏟아진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LA 사는 동문 20 명이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했다. 둥글게 앉아 있으니 누가 스승이고 제자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는 함께 세월을 엮고 있었다. 무척이나 어른스러우셨던 선생님과 우리가 8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고 모두 한바탕 웃었다. 시곗바늘을 왼쪽으로 돌리며 세월의 틈새를 좁혔다.

 

심미안을 발달시켜라.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도 하늘을 바라보며 높은 뜻과 맑은 꿈을 키워라. ”

 

종례 시간이면 들려주시던 말씀 따라, 언론인, 작가, 의사, 교수로 전문 분야에서 내로라 활동하고 있는 제자들이 자랑스러워 입이 다물어지질 않으신다. 대학교수로 정년퇴임 하시고 근래에는 그림사랑회라는 유화 모임 회원으로 9 말이면 번째 전시회가 열린다 하셨다.

자연 앞에 털고 앉아 하나님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며 ! 아름답다. 저절로 탄성이 나와. 그날그날 보람있는 일을 찾아서 새로운 생활로 이제부터 노년기까지 즐겁게 시간을 만들 꺼야.’ 선생님의 표정에서 읽어 내린 모습이다.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삶을 즐길 아는 멋진 선생님. 선생님은 나에게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떠나셨다.

서울에 오면 들르렴, 우리 마당에는 지금 가을꽃이 한창이란다.

선생님 음성에는 가을 향기가 배어 있었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