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향기
유숙자
몇 년 전 친구가 가져다준 선인장을 들여다본다. 10여 년간 미국에 살면서 두 번 밖에 꽃을 보지 못했다는 이 선인장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떠났다. 몸체가 워낙 작고 빈약하여 사랑을 충분히 해주어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 했다. 이 선인장에 유독 이런 말이 붙여진 것은 그만큼 꽃 피우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리라.
친구는 이따금 전화했다. 꽃 소식을 앞세운 친구의 음성에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50대 중반에 미국에 와서 대학 강단에 10여 년을 섰다가 떠났는데. 나이 들어 보낸 시간은 생의 어느 때보다 더 살뜰하고 의미 있었을 터인데 어느 한순간을 떠올려 봐도 그립지 않은 것이 있을까. 나도 친구처럼 선인장 사랑 이를 보듬다 보니 제법 식구를 늘려 해를 거듭할수록 소복이 작은 돔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며 활엽수들이 푸름을 잃을 때쯤 선인장은 몇 개의 작은 꽃망울을 이파리 사이에 달았다. 내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어떤 꽃을 피워낼까 몹시 궁금했다.
한동안 꽃망울을 물고 있던 이파리가 드디어 꽃잎을 활짝 열어 보였다. 노란빛의 꽃, 빗살처럼 가녀린 앉은뱅이 꽃이다. 마치 노랑나비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것 같다. 꽃잎의 섬세한 모양이 말의 표현을 거부한다. 이같이 화사하고 고운 모습을 보이려고 세월을 기다린 것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꽃잎이 흩어질 것 같다.
어느 분은 ‘꽃 가까이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는 것처럼 야만스러운 행동은 없다.’고 했으나 나는 그 야만스러움을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다. 시간을 두고 피워낸 꽃의 향기가 궁금해서다. 은은한 향기. 먼 곳으로부터 이는 바람결에 살며시 실려 온 듯 미세한 ‘샤넬’의 향기가 꿈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나는 향수를 애용했다. 그 중에도 오리지널이라는 일본 향수를 좋아했다. 어떤 형태이건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했으나 여인은 자신의 향기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즐겨 애용했다. 몇 년 후, 그 향수가 품귀를 빚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남편이 생일 선물로 <샤넬 NO. 5>를 사다 주었다. 향이 은은해서 좋아할 것이라며 손에 쥐여준 향수는 놀랍게도 향기가 거의 비슷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 향기에 매료되어 지금은 <샤넬 NO. 5>가 나의 향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 품을 파고들면서 ‘음, 엄마 냄새 좋다’며 코를 벌름거렸다. 아이들은 샤넬의 향기를 엄마 냄새로 알고 있었다.
선인장은 아침이면 노랑 꽃잎을 활짝 열고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며칠 반복하더니 다문 입을 다시 열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에 비해 순간에 머물다 스러졌다. 몇 년을 웅크리고 뿌리에서, 줄기에서, 잎에서, 가장 고운 색채만을 응집하여 마침내 피워낸 꽃, 그 단명이 너무 애처롭다. 짧은 만남이 아쉬워 마른 향이라도 간직할 양으로 꽃을 따서 책갈피 속에 눌러 놓았다.
한 번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가시나무 새. 날카로운 가시나무에 가슴을 찔리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는 새를 선인장 꽃과 비교하고 싶음은 왜일까.
잠시 스쳐 지나는 것이 어찌 이 선인장 꽃뿐이랴. 영겁을 두고 볼 때 우리 인생도 그 삶이 찰나에 불과한 것. 꽃은, 기다린 보람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났다 스러지지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지, 숙연해진다.
긴 기다림 끝에 보여 준 꽃의 미소, 내게 찾아와 꽃피운 선인장은 귀한 인연이며 멀리 있기에 더욱 그리운 친구의 모습이다. 혼곤히 잠이 든 마른 꽃잎에서 노란색 우정을 본다. 선인장 꽃향기가 꿈결처럼 내 주위를 감돈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