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사람

유숙자

어렸을 선친께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많은 고사를 들려주셨다. 삼국 시대에서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와 인물, 전쟁사에 대해 말씀하셨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교훈을 일러 주셨다. 삼국지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시며 삼국지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하셨다. ‘ 임금 시대의 이야기라든지 진나라 시황에 관한 이야기 , 그때가 중국의 고전을 가장 많이 들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고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면 언제나 정직이 생명이라는 말씀에 곁들여 과불급, 중용, 인내라는 단어를 많이 쓰셨다. 당시에는 무심히 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그때의 말씀이 교훈으로 남아, 살아오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성하여 스스로 취사선택하여 읽을 때보다 선친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가슴 깊이 남아 있다. 그것은 때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언행을 하게 만들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신문에서 보통사람 클린턴이라는 제하에 55 생일을 워싱턴에서 조촐하게 보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백악관을 떠나 평범한 시민으로 생일을 맞는 클린턴은, 부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 의원, 첼시와 함께 8 19 워싱턴의 번화가 듀퐁서클에 있는 토마테 식당에서 식사했다. 식당 측은 클린턴 가족을 알아봤지만, 전임 대통령 예우 대신 일반 손님과 똑같이 대접했고 클린턴 측도 특별대우를 요청하지 않은 손님들 속에 섞여서 식사를 마쳤다. 저녁 식사 후에는 시네플렉스 오데옹 극장에서 마지막 심야프로를 관람했다.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대부분의 다른 관객들이 클린턴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몰랐으며 극장 측도 특별 대접을 하지 않았다.'

 

기사를 읽으며 클린턴이 멋있는 사람임을 새삼 확인했다. 인상에서 풍기는 노련함, 불가능도 가능으로 이끌만한 여유로움을 평소 좋아했다. 거기에 맞추기라도 하듯 미국사람들의 의식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살아오면서 흔히 보아온 것은 권력층 사람들이 권위주의에 젖어 남이 알아주고 특별히 대우해 주기를 바라지 않던가. 때로 친척 중에 높으신 어른만 계셔도 권력자보다 목에 힘주는 것을 왕왕 왔었다. 현재의 위치보다 나았던 예전을 들먹이는 사람은 얼마나 많던가. 평범한 시민으로 물러앉아 보통 사람 속에 섞여 자축하는 클린턴의 인간적인 모습이 멋있었다. 현재의 모습 그대로 삶을 즐길 아는 사람이 멋을 아는 사람이고 자신과 주변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본다.

 

본국 대통령이 코리아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했다. 대통령이 떠난 이상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일종의 상술이었는지 몰라도 선반 위에 대통령이 식사하신 그릇이라고 진열해 놓고 대통령이 식사하던 자리라고 팻말을 붙여 놓았다. 그것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난다.

 

국가적 대외 행사 ,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몹시 민망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외국에 나간 우리 정상이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다느니, 우리나라 정상이 외국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앞에서 번째로 섰다든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의미를 두는 것을 본다. 여론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어느 사회 계층에서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좁은 국면에 연연하지 말고 대국적인 면에서 보고 냉정하게 판단했으면 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섰다고 이미 오래되었어도 어느 부분은 아주 낙후된 면이 있음을 본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지금도 소시민으로 살고 있고 권력과 깊이 연결되었던 적이 없었어도 권력이란 것에 번이라도 맛을 들이면 커피맛보다도 향기롭고 매혹적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관람했다. 그때 친구의 권유로 제주도를 여행했는데 친구가 아는 분이 그곳에서 유명한 유지였다. 그분은 국내 35단체에 직함이 올라 있었다. 함께 움직이면 어디를 가나 칙사 대접이다. 길에서도, 식당에서도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느라 제대로 식사를 없을 정도다. 잠깐이었으나 내가 살아오면서 타인에 의해 덩달아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거한 대접을 받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기내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어갔다. 나중에 승무원이 뭔가를 보따리 가져다주었는데 건어물과 함께 제주도에서 육지로 반입이 금지된 화분이었다. 친구가 좋아해 무리하게 부탁한 모양인데 함께 왔으니 어부지리로 나도 얻게 되었다.

 

김포에 도착한 , 귀빈실을 거쳐 나왔고 공항청사 밖까지 물건을 들어다 주었다. 잠시 친구와 함께한 여행에서 받은 대접이 놀라웠기에 참으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이것이 공권이나 권력의 남용으로 보기에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특별대우의 달콤함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이래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맛에 취하는 것인가 보다. 특히 자기 성찰이나 뚜렷한 철학 없이 권력만 추구하는 많은 권력자가 더욱 그런 것은 아닐까. 내가 받은 혜택의 야릇한 맛이 오래 남는 것을 보면, 권력과 재력을 겸비할 때의 몸가짐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할까가 새삼스럽게 이슈로 대두하였다.

 

오래전 몰락한 이멜다 여사의 구두가 화제가 되었다. 그때 모두 입을 모아 그녀의 사치벽을 개탄했으나 눈에 보였던 구두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부정 축재가 얼마나 많았는가. 권력을 잡으면 그만큼 불안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리여서 축재에 정신을 쏟는 같다.

 

정직이 생명을 좌우한다는 , ‘과불급 중용, ‘인내 단어들이 새삼 깊게 들어 온다. 선친께서 하고많은 중에 유독 말씀을 강조하신 뜻을 살아가며 자주 일깨우게 된다.

신념을 지니고 자신 있게 삶에 임한다면 구태여 나를 들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만족한다면 세상이 모두 안에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 대접받기보다는 의연하게 보통사람으로 살아갈 멋있는 사람이 되고 값지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겠지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