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열매

                                                                                                                                                               유숙자

먼동이 틀 무렵 눈을 떴다. 밤새도록 잠이 깊이 들지 않아 뒤척이다가 창이 환해졌기에 일어났다. 오늘은 큰아들 생일이다. 음식도 미리 장만해 두었고 아이들은 저녁때나 되어야 오련만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고 잠을 설쳤다. 큰아들이 자신의 신붓감을 동생 내외에게 소개하는 날인데 웬일로 내 마음이 더 설렌다.

학업을 마치고 그대로 샌타바바라에서 결혼하여 사는 작은아들과는 달리 큰아들은 학교를 마치고 근무처가 정해진 후에도 3년 넘게 집에서 다녔다.

 

몇 해 전, 집에서 근무처가 너무 멀어 거처를 옮겨야 하겠다는 말을 했다. 긴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는 것이 안타까웠기에 선뜻 대답은 해 놓았으나 속마음엔 결혼하기 전까지는 집에서 다녔으면 하는 서운함이 숨어 있었다.

아들은 거처를 정하고 나서도 섭섭해할 엄마를 헤아렸는지 짐을 한꺼번에 옮기지 않았다. 주말이면 와서 한두 개씩 가지고 갔다. 컴퓨터와 책상, 책장과 책들, 앰프---. 거의 한 달에 걸쳐 늘 그 방에서 보아오던 물건들이 하나씩 빈자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몇 개 안 남은 나머지 물건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벌써 떠났어야 했지. 그렇게 먼 길을 3년이나 다녔으니. 왕복 90마일을.'

 

어느 날 무심히 방문을 열었을 때 공간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군데군데 눌려 있는 카펫 자국이 아들이 있었던 흔적을 나타낼 뿐-. 서너 시간이 지나도 그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깨끗이 치워놓고 간 방, 사방이 반듯했으나 뭔가 하나, 나를 위해 남겨 두었을 것 같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있었을까. 해가 기울어져 아들 방 창가에 노을이 타고 있었다. 나는 노을빛이 물든 창가에 서서 눈이 붓도록 울었다.

아들이 집을 떠나고 나니, 비로소 어머니 생각이 난다. 딸을 멀리 보내 놓고 힘들어하시던 어머니. 보내 드린 사진을 보고 또 보셔서 귀퉁이가 다 닳았다고 울먹이며 전화 주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게 된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거의 해마다 서울에 가서 한 달 이상을 지내다 왔다. 명목은 어머니 뵈러였다. 이번만큼은 어머니 곁에 오래 있어야지. 단단히 벼르고 떠났으나 도착한 후에는 어찌 그리 달라질 수 있을까. 친구들 만나랴, 여행 다니랴, 정작 어머니 곁에 머무는 것은 고작 일주일에 불과했다.

‘둘째야, 내가 너를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떠날 날이 임박할 때쯤이면 눈물을 글썽이시며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엄마, 내년에 또 올게요. 엄마는 건강하시잖아, 오래오래 사실 거에요.’

언제까지나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연로하시므로 마음이 약해지신 것이려니 했다. 지금의 나는 그 당시 어머니보다 훨씬 젊고 아들이 불과 45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어서 어머니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련만 아들이 떠나고 난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애절했던 마음을 통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나이에 몇 나라를 거쳐서 살았으나 그때마다 잘 적응해 주었다. 사춘기 때 영국에서 받은 엄격한 교육과 오랫동안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한 것이 도움되었다. 아이들이 자라온 과정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가끔 내게 이상형의 며느릿 감에 관해서 물었다.

‘누가 알아요? 이렇게 잠잠히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랑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할는지.’

왜 그랬을까, 누가 물을 때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곧잘 이렇게 대답했다. 무심히 한 말이었는데 6년 전 작은아들은 정중한 편지로 결혼 의사를 밝히고 몇 주 후에 내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미국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결혼 일시를 알렸다.

작은며느리는 비교적 자상한 편이나 감정이 우리네와 달라서인지 아직도 손님 같기만 하다. 그렇기에 큰며느릿감은 우리의 정서와 생활습관이 통하는 한국 아가씨였으면 했다. 부모의 바람도 아랑곳없이 큰아들은 공부와 일에만 열중할 뿐 결혼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때가 내 결혼 적령기예요.’ 너무나 태평이다. 더구나 미국 아이들이 더 편하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일반적으로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와는 친정어머니만큼 다정하게 지내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큰며느릿감마저 미국 아이라면 내가 많이 쓸쓸할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국 며느리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그즈음 어느 날부터인가 큰아들의 생활에 차츰 변화가 일고 있었다. 매 토요일이면 가져오던 빨랫감을 요즘에는 격주 정도로 가져 온다. 큰아들이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 눈치가 분명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거의 1년이 가까워질 무렵, 한 아가씨를 소개했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한국 아가씨라 했다. 한국말은 “네” 소리만 할 뿐 다른 말은 거의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네” 하길레 신통해서 알아들었니 하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저 조금 알아들어도 못 알아들어도 생그례 웃으며 “네” 한다. 그것은 조금도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한국 아가씨라는 것 한가지만으로도 감사했다.

 

긴 세월 동안 자식을 위해 드린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자식을 향한 염원은 무심히 한 말 한마디, 생각마저 기억하고 계셨다가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제 골고루 한국 딸까지 맞게 되었으니 가장 무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시 모녀지정을 쌓아가리라. 마음속에 꽃밭 하나 더 가꾸어 나가리라.

딸 부럽지 않게 다정다감한 큰아들이, 이제 며느리 남편의 자리로 옮겨 앉을 시기가 온 것이다. 내 아들로 태어나 세상누구 보다도 착하고 효성스러웠으니 축복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큰아들이 결혼하게 되니 주변에서 걱정이 많다. 워낙 효자 아들이었기에 내가 많이 서운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여 연민의 눈빛으로 나를 본다.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아들이 알면 서운할 정도로 시원하기 짝이 없다. 아들이건 딸이건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한 가지, 마음속에서 임없이 일고 있는 것은 지난 34년 동안 엄마로서 온 힘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오랜 국외근무로 집을 비우는 남편의 몫까지 사랑한다며 아이들을 힘들게 한 적은 없었을까. 내가 힘에 부쳐 감당하기 버겁던 아이들 교육이나 그 외 잔잔한 일상사에서 지나치게 간섭한 적은 없었을까. 나는 그것을 부모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으나 아이들은 그 나이에 맞는 자유를 원했을는지도 모르리라.

 

순종하며 잘 자라준 두 아들에게 감사한다. 다만 엄마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되 너희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아끼되 간섭하지 않고 너희 의견을 존중해 준 것이다. 이 세상 어느 엄마보다도 너희를 많이 사랑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을 앞둔 큰아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