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집 Junk Ship

                                                                                         유숙자

비가 그치고 난 후, 눈 부신 햇살이 신선하다. 물기 오른 나무들이 싱그럽고 나풀거리는 이파리에서 윤기가 흐른다. 정원에 있는 꽃나무가 일제히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루비 빛 흑장미와 진줏빛 분홍장미도 부끄러운 듯 감싸고 있던 새촘한 꽃잎을 활짝 열었다. 고혹적인 자태이다.

성급한 분홍색 장미꽃이 서너 개의 꽃잎을 떨구고 있다. 잔디 위에 흩어져 있는 꽃잎이 그림처럼 곱다. 이슬을 품고 누워 있는 싱싱한 꽃잎이 낙화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마당 가득 엷은 향기가 은은하다. 먼 그리움 속에 잠들어 있던 런던, 장미와 정크 쉽이 어른거린다.

 

내가 살던 “선버리 언 템임즈”는 런던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교외에 있는 동네다. 집 앞길 양쪽에 몇백 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어 울창한 잎들이 아치 모양으로 하늘을 덮고, 집집 마다 장미가 많아 그 향기가 동네에 바람처럼 흐른다.

마을이 마치 나무숲 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온통 푸른색이다. 집에서 2분 거리에 템즈 강이 있다. 강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들이 그림 같고 강가에는 수선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행여 나르시스의 환생이 아닐까. 강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워 빠져들 만한 소년은 없고 웬 낯설고 초라한 중년의  여인이 비친다. 강가의 주인은 아무래도 한유하게 놀고 있는 백조의 무리 같다.

 

초여름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영국인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런던 인근의 템즈 강 가까이에 있는 <정크 쉽>이라는 중국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은 특이한 것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긴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별세계가 활짝 펼쳐졌다. 커다란 범선 모양으로 꾸며진 넓은 홀에 문명의 이기는 전혀 없고 중세기의 고풍스러운 그림 몇 점이 유일한 장식품이다. 실내를 촛불로 밝혀 놓아 마치 몇세기 전 시대에 앉아 있는 듯 아늑하고 환상적 분위기이다. 벽 한 면에는 실물 크기로 그려진 <정크 쉽>이 세 개의 거대한 돛을 달고 위용을 뽐내듯이 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촛불의 헌신을 알고 있는 연인들의 마음이 은밀하고 꿈꾸는 듯한 눈빛이 교감을 이룬다. 창 너머 강물에 흔들리는 불빛과 초롱이 모습을 나타내는 별을 따라 <정크 쉽>은 런던 타워 밑으로 꿈처럼 흐르고 있다.

<정크 쉽>이 런던의 명소가 된 것은 촛불과 장미와 음식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굵은 밀초의 불빛이 환상적이고 촛불이 연소하며 뿜는 향기가 은은하여 첫날밤을 맞는 신방을 연상케 한다. 테이블마다 둥근 수란이 담긴 수반에 장미꽃 모양의 촛불을 띄워 놓아 촛불과 물과 수란의 조화가 기막히게 아름답다.

 

그곳엔 특별한 의식이 있다. 그날 손님 중에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장미를 선물한다. 아늑한 분위기에다 값에 비해 맛있고 고급스러운 여섯 코스의 요리가 일품이어서 언제나 빈자리가 드물다고 한다. 손님들은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고 느긋하게 앉아 담소하며 여인들은 한 번쯤 장미의 여왕을 꿈꾸어 본다.

장미의 여왕은 <정크 쉽>을 34년째 운영하는 주인이 선출하는데, 장미를 받는 것도 기쁘지만, 손님 모두가 기립 박수로 축하해 주어 영광스럽다. 장미의 여왕은 신나게 울리는 팡파르의 흐름을 타고 왈츠에 맞추어 홀을 돌며 답례의 춤을 춘다.

 

그날의 유일한 동양인이어서일까, 그 영광이 나에게 안겨진 것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주 중에 런던 거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동양 사람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동양 여인에게 선심을 쓴 것이리라. 

친절한 이웃의 초대로 예상치 못했던 분위기에서 생소한 의식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그날 나는 놀라고 당황했던 이상으로 기쁘고 행복했다. 권위 있는 의식이 아니라 해도 작은 아이디어로 많은 여인의 가슴을 매일 밤 설레게 하고 행운을 안겨주는 <정크 쉽>은 분명 연인들이손꼽는 즐거운 레스토랑이다.

 

<장미의 집 정크 쉽>은 그런 의식 때문에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 가고 그날의 행운을 얻으려는 여인들로 만선을 이룬다. 황 촉 불과 어우러지는 선율의 중국 궁중 음악과 신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안개빛 분위기, 밤하늘에 길게 누운 은하의 강줄기 따라 흐르는 정크 쉽은 별 속에 묻혀 매일 밤 별 꿈을 꾸리라.

 

해마다 장미가 꽃잎을 벙글기 시작하는 오월이 오면, 내 마음은 나의 그리움의 도시 런던을 향해 길을 떠나고 가슴 속에서 추억의 장미를 한없이 피워 올리고 있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