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44
신순희
한적한 시골길에 버스 한 대가 달리고 있다. 저만치 서 있던 중년 남자가 두 손을 휘저으며 버스를 세운다. 44번 버스, 운전사는 젊은 여자다. 버스 안은 승객이 적당히 차있다. 중년 남자를 태운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조금 더 달리던 버스 앞에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버스에 올라탄 두 남자는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칼로 위협해 돈을 갈취한다. 그리고 그냥 내리지 않고 여자운전사를 잡아 끌어내린다. 반항하는 운전사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승객 모두 침묵하고 있을 때 아까 버스를 세웠던 중년 남자 혼자 강도의 행위를 말린다. 중년 남자는 강도에게 얻어맞고 칼에 다리를 찔려 길에 쓰러진다. 운전사를 성폭행한 강도들은 도망친다. 버스로 돌아온 운전사는 잠시 운전대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원망의 눈초리를 승객들에게 보내지만 모두 외면한다. 그때 자신을 도와준 중년 남자가 다친 다리를 끌며 다시 버스를 타려 하자 운전사는 타지 못하게 막는다. 중년 남자는 ‘나는 조금 전 당신을 도우려 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지만 운전사는 버스 문을 닫고 출발한다. 중년 남자는 터덜거리다 지나가던 승합차를 간신히 세워 동승한다. 한참 길을 가다 보니 앞에 교통사고가 났다. 중년 남자가 탔던 44번 버스가 커브 길에서 절벽으로 추락한 것이다. 전원 사망이라고 경찰이 알려준다. 중년 남자는 알듯 모를 듯 미소를 짓는다.
200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중국 단편영화 ‘버스 44’의 줄거리다. 실화를 바탕으로 찍은 11분짜리 영화다.
버스 44,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다. 왜 여자운전사는 중년 남자가 다시 버스를 타지 못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마지막에 풀렸다. 예상치 못한 결말은 어찌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하다. 여자운전사는 자살하면서 혼자 죽지 않았다. 버스를 절벽으로 몰아 수수방관한 사람들과 함께 죽었다. 중년 남자를 제외한 모든 승객에게 복수했다. 영화와 달리 실화에서는 다시 버스를 탄 중년 남자를 운전사와 힘을 합한 승객들이 억지로 끌어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미 승객들과 운전사는 한 배를 탄 셈이다. 한 운명이라는 것을 승객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운전사가 마음속으로 꾸민 음모를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영화를 본 뒤 여운이 길다. 과연 나는 저들 중 누구에 속할까. 여자운전사를 도와준 중년 남자일까, 아니면 모른 척 외면한 승객들 가운데 하나일까. 타인이 불의에 처했을 때 침묵하는 것도, 가만히 있어도, 알고도 모른 척한 것도 죄인가.
나는 나이 들고 연약한 여자인데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봉변을 당할 수는 없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된다. 아니다. 어른으로서 앞장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럴까. 시대가 변해 어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어른 앞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꾸짖다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난다지 않는가. 속으로 분노하고 겉으로는 침묵한다.
그렇다면 젊은이라면 불의에 맞서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할까. 요즘 젊은이들은 나 중심이라 남에는 관심이 없다. 얼마나 이기적인데. 그래도 젊은 피가 끓는데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열, 연애하느라 다 바치고 명품 사는데 다 소비한 건 아닐까. 지난 시절 어려웠을 때처럼 철학을 논하는, 시를 읊던 젊은이들은 소설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젊으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면 저돌적으로 변하는 것이 청춘이다.
이건 어떨까. 승객들의 수가 범인들보다 많으니 승객들이 하나로 뭉치면 되겠다.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더구나 상대는 칼을 가지고 있다. 총이 아니고 칼인데. 그래도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다.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건 아니지. 쓸데없이 남의 일에 휘말려들어 귀한 목숨을 잃을 수는 없다.
승객들은 버스에 앉아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시켰을지 모른다. 모른 척 외면하고 침묵하는 게 상책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운전사는 어땠을까. 버스에 앉아 있는 저 많은 승객 가운데 나를 구하려 드는 사람이 중년 남자 하나뿐이란 말인가. 저 아주머니는 같은 여자로서 내가 성폭행당하는 줄 빤히 알면서 시치미 떼고 앉아 있다. 내가 저 아주머니의 딸이었더라도 그랬을까. 내가 운이 나빴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당하는 거지. 그래도 그렇지, 저들은 성폭행당하고 돌아온 내게 한마디 위로의 말도 없다. 가만있지 않겠다.
함께 살려면 타인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불의를 당하는 타인을 도와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머리로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버스 44’를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나는 아직 선뜻 칼 든 범인에게 대항하고 여자운전사를 돕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단호하게 못 한다는 사람, 이 핑계 저 핑계로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 한숨 쉬며 고민하는 사람…..나도 고민 좀 해야겠다. 불행한 고민이다.
[2014년 6월]
--미디어한국 201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