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순대

유숙자

봄볕이 화창한 날, 후배 K가 찾아왔다. 꽃무늬 블라우스가 아름다운 후배는 꽃을 안고 있어 봄의 여신 같았다.

‘마당에 튤립이 곱기에 선배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이건 순대고요.’

‘어머, 튤립과 순대?’

청자 빛 화분에 싱싱한 잎사귀를 거느린 튤립이 자색 왕관을 쓰고 꽃대 위에 상큼 올라앉아 있다. 쇼핑백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오늘 계획에 없었던 후배의 방문이 반가웠다. 튤립은 봉오리를 반쯤 연 채 다소곳하다. 이 꽃으로 하여 이 봄이 마냥 즐거울 것 같다.

 

얼마 전 후배와 이야기를 나눌 때 순대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전에는 먹지 못했는데 근래에 맛이 들여 이따금 생각난다고. 그 사소한 말을 관심 있게 들었다가 오늘 나에게 행복을 선물해 주었다.

내일은 밸런타인스데이다. 요즈음은 그 근본의 의미와 달리 친구들 사이에도, 남녀 구별 없이,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꽃과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자상한 후배 덕분에 오늘은 나도 그 대열에 낀 셈이다.

 

어릴 적 내 소망 중 하나는 집 안에 항상 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화단에 달리아, 분꽃, 한련, 봉숭아로 만족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치기 같은 꿈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그라지지 않아 가정을 이룬 후 식탁에 거의 꽃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나와 결혼기념일이 같은 친구가 남편과 다투고 하소연할 겸해서 들렀다. 사연인즉 남편이 결혼기념일에 커다란 장미 다발을 선물했다는데 그것이 발단이었다. 친구는 정원에도 꽃이 수두룩 한데 왜 돈을 주고 사 왔느냐고 화를 냈고, 꽃을 받고 화를 내는 당신도 여자 축에 드느냐고 해서 한바탕 일이 벌어졌다는 것. ‘아! 공평치 못한 세상. 우리 남편이 나에게 장미 다발을 안겼더라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을 텐데.’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며 복에 겨워 보이는 친구의 어리광을 다독여 주었다.

 

꽃을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시들면 쓰레기로 변하는데 비싼 값을 내고 사는 것을 아까워한다. 물론 취향에 따라 다르겠으나 꽃은 우리 영혼을 빛나게 하는 향기라 생각한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정신적 여유를 지닌 사람이 아닐까. 사람이 빵으로만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꽃은 향기로운 생명력이 있기에 감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가. 이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듣는 여유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꽃을 보며 파르르 떨리는 심장을 의식한다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낄 줄 아는 멋을 지닌 사람 일 게다.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가 있다. 오래되어 제목은 떠오르지 않으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었던 명장면들은 지금까지 가슴에 선연히 남아 있다.

어느 부호가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부호는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 자신의 성으로 초청했다. 매일 저녁 여인을 위해서 파티를 열고, 밤에는 시종을 시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와 선물을 전했다. 덮개가 달린 은쟁반에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펄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보석을 매일 번갈아가며 보냈으나 여인은 뚜껑만 열어 볼 뿐 편지와 물건은 손도 대지 않은 체 그대로 돌려보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좋다는 선물을 다 바쳐도 조금의 동요도 없다.

 

내일이면 여인이 떠나는데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부호는 초조하기 이를 데 없다. 부호는 그날 밤 마지막 선물을 들고 직접 여인을 찾아갔다. 여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쟁반을 높이 들었다. 쟁반 위에는 한 송이 장미가 놓여 있었다. 장미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던 여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여인은 천천히 손을 뻗어 장미를 집어 든 다음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마침내 그의 마음을,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증표였다. 여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영원한 것, 영혼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원했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음식과 화려한 파티, 보석보다 영혼을 비옥하게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택했다.

 

튤립은 하루가 다르게 꽃대를 쑥쑥 올리더니 꽃망울들이 봄을 뿜어내듯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꽃이 핀다는 사실은 한없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추운 겨우내 기다려온 꽃들은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며 팡파르를 울리고 있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내 터전으로 제일 먼저 찾아든 봄. 나는 봄 향기와 꽃향기에 취해 현기증이 날 것 같다.

 

생각지도 않았던 친구의 엽서를 받았을 때처럼, 이른 아침 풀잎에 맺혀 있는 영롱한 이슬을 보았을 때처럼, 바위를 비집고 나온 가녀린 풀꽃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낄 때처럼 후배는 내게 잔잔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활짝 핀 튤립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모처럼의 별식인 순대를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린다. 봄의 향기처럼 식욕이 살아난다.

이 꽃으로, 따뜻한 한 잔의 차로, 내가 누렸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 꽃향기처럼 행복이 날개를 펴는 시간, 봄, 봄. 바야흐로 봄이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