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하례
유숙자
새해를 맞는 각오는 누구나 각별하다. 그 아침에 우리는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동쪽 하늘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찬란한 햇빛은 우리에게 무언가 모르지만 한없는 희망에 들뜨게 한다. 매일 떠오르는 똑같은 해이건만 새해 아침에 뜨는 해는 만물을 신선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다짐하고, 결심하게 된다.
거창하게 세웠던 계획일수록 작심삼일을 면치 못한다. 아주 작은 일, 쉬울 것 같으나 잘 지켜지지 않는 일, 생각이 머물기만 하면 지킬 수 있는 일을 우선으로 계획하여 깊은 내면으로부터 조그마한 변화라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정초가 지나고 며칠 후,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연 전에 오랜 직장 생활을 끝내고 책과 여행을 벗하며 지내는 친구다. 신년하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전언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워낙 기발한 아이디어로 늘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친구라 뭔가가 있을 것 같은 호기가 동하여 서둘러 채비를 했다.
친구는 여느 때보다 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바의 “해피 뉴 이어”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신년하례식이라 하여 몇 명이 모이는 줄 알았는데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더 올 사람은 없어?” “글쎄-” 친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차를 따르는 친구는 매사 여유 있고 자신만만하던 기백이 전혀 없이 맥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중병을 앓고 난 것 같이 수척해 있었다. 근래에 가슴이 시려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으나 단순한 겨울 앓이로만 생각했다. 그저 흐르는 세월의 무상이 친구를 나약하게 만드는 줄 알았다. 아직도 결혼 적령기가 되지 않아 혼기가 늦어진다고 늘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기에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둔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친구의 시선은 창밖을 의식하곤 했다. 마치 누구를 가다리기라도 하듯이. 좀 있으려니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인기척이 났다. 친구가 문을 열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글쎄”의 주인공이 아닐까? 먼발치로 봐도 캐주얼 차림이 잘 어울리는 젊은이였다.
밝은 미소로 청년을 맞는 친구를 보며 머리가 띵했다. 아무리 진보된 세상이라 해도 저렇게 새파란 청년과? 그렇지! 그는 꽃집에서 배달 온 청년이었다.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를 가끔 보여 주었기에 '글쎄'를 결혼이라는 폭탄선언으로, 청년을 결혼 상대자로 알았던 나의 순간적 착각이었다. 거실 중앙에 놓인 꽃으로 집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우리는 찻잔을 높이 들고 새해를 축하했다. 신부처럼 곱게 차려입은 친구의 멋진 드레스가 올해 안에 웨딩드레스로 변해 주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원했다. 재스민 티가 주는 깊은 맛과 향기가 꽃과 어우러져 색다른 차의 향을 선사해 준다.
누군가 그리울 때, 외로울 때 우리는 편지를 쓰거나 만나고 싶다. 나의 마음을 전하고 상대방을 내 마음에 초대하는 것이다. 친구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새해를 자축하고 싶어 자신에게 꽃을 보내고 함께 축하해 줄 사람과 새로운 다짐을 보여주기 위한 인증 자가 필요했던 것, 어쩌면 그것은 외로움을 떨어내기 위한 안간힘일 것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새해 희망을 밝히고 다짐한다. 그것이 해마다 같은 것의 반복이라 할지라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가능성이 있고 언젠가는- 하는 희망을 품고 있기에 꿈을 꾸며 기다리게 된다. 지난날에 뜻을 세웠으나 지키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또 한 번 다짐할 일이다. 새롭게 다가올 새날을 위하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