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손녀 빅토리아

유숙자

빅토리아 첫 돌잔치 때이다.

가족끼리 단출하게 치를 계획으로 준비하며 입양을 알선한 가슨 변호사를 초청했다. 변호사는 빅토리아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함께 초대해 줄 것을 원했다. 응당 입양기관에 있는 사람이려니 짐작했는데 뜻밖에 산타바바라에 거주하는 기관장들이 아기를 둘이나 입양하여 모범적으로 키우고 있는 아들네 소문이 근동에 자자하여 축하해 주려 온 손님들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의 방문으로 잔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미국은 아이를 입양하면 입양기관에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정기적으로 입양 부모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교육한다. 입양아를 양육하며 겪는 과정을 토로한다. 윌리엄을 입양해 기른 경력이 있기에 며느리는 다른 입양 부모들보다 모든 면에 익숙하다.

 

윌리엄이 네 살이 되던 봄, 작은 며느리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가슨 변호사라 밝힌 그는 3주 후에 태어날 백인 아기가 있는데 혹시 입양할 의향이 있느냐 물었단다. 가슨은 이미 4년 전 윌리엄의 입양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은 며느리로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제안을 받고 당혹스러웠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며느리는 몸이 약해서 감당할 부분이 많지 않고 오직 윌리엄 하나만을 잘 키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그날 밤 아들 내외는 밤잠을 설쳐가며 고심했다. 오늘까지 윌리엄이 잔병치레 없이 잘 자라주어 늘 감사했는데 의외의 전화는 평화롭던 아들 가정을 걱정과 혼란에 빠뜨렸다. 며칠을 고심하며 열심히 기도했단다. 일면식도 없는 변호사로부터 받은 제의가 심상치 않고 왜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입양문제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답을 구하기 위해 꼬박 일주일을 기도했다. 만약에 아기를 데려온다면 윌리엄의 반응이 어떨까가 가장 큰 문제였다. 입양에 따른 제반 비용도 만만치 않기에 심사숙고 했다.

 

신중을 거듭한 끝에 아들 내외는 입양을 결심했다. 윌리엄은 5년간 찾아 기다리던 끝에 얻은 아기인데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 자녀를 얻게 됨을 감사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피를 받고 자란 아기를 사정이 있어 기를 수 없게 된 여인의 아픔이 떠나지 않더라 했다. 입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부지런히 서류를 작성하여 절차를 밟았다.

 

3주 후, 작은 며느리는 산모에게 산기가 돈다는 의사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출산 경험이 없는 며느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아기의 탯줄을 끊었다. 예쁜 딸을 품에 안았다. 눈물이 나더라 했다. 산모에게 아기와 작별할 충분한 시간을 갖게 한 뒤 아기를 데리고 왔다. 내 손녀로 연을 맺게 된 두 번째 아기 빅토리아다.

 

빅토리아의 복 많은 아기다. 마침 그때 작은 아들네는 차를 바꾸려고 쇼핑하러 다니던 때였다. 빅토리아는 새 차 대신 아들 집으로 들어온 선물이다. 기를 능력이 없는 아기, 받아 주는 것만으로 감사하지 않을까가 아니다. 입양절차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다. 빅토리아는 잔병치레 없이 잘 자랐다. 예민하여 아들 내외가 자주 밤을 새웠던 윌리엄 때와 달리 성격도 남자 같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아 매사가 순조롭다. 그것은 첫아기를 기른 후라 경험 있어 좀 수월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겠으나 워낙 아기가 무탈하게 잘 커 주었다.

 

올해는 산타바바라에 머문 시간이 많았다. 빅토리아가 프리스쿨 다닐 나이가 되었다. 외할머니가 손녀의 등 하굣길을 도와주었는데 그 기회를 내게 조금 나누어 주었다. 격주로 가게 되는 샌타바바라까지 편도 160km의 거리가 멀게 생각되지 않은 행복한 작업이었다. 잠시나마 손녀를 돌볼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했다. 빅토리아가 3살이 되면서 작은 며느리가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또한, 온전히 외할머니 몫이었으나 사돈께서 나에게도 혜택을 주어 손녀 재미를 보게 되었다. 기뻤다. 행복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내 아이를 기를 때는 경험 없이 부딪혀 어려움이 많았으나 손주는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는 역할 뿐이다. 나머지는 엄마, 아빠의 몫이기에. 잠시 동안이었으나 천진한 아이들에게서 때 묻지 않은 세상을 보았다. 아들 내외의 교육도 한몫이겠지만, 아이들 성품이 착해서 곱게 잘 자랐다.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산 지 30년이 넘었다. 작은아들은 어려서 한국을 떠났고 미국인 아내와 미국 아이 둘을 입양했기에 삶의 방식이 미국식이다. 미국이 자유분방한 것 같이 보이나 봉건적인 나라다. 아들 내외도 아이들에게 무척 엄격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철저하게 절약 정신을 가르친다. 방 정리, 청소를 담당케 하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다. 특히 어려서부터 말씨와 행동에 예의를 갖추도록 가정 교육이 철저하다. 1년에 몇 번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보면 부산하지 않아 요즘 아이들 같지 않다고 칭찬해 주었는데 함께 지내는 동안에 보니 엄한 부모의 가정 교육과 아이들이 순종하며 잘 따라 준 탓이다. 내 아들 며느리가 낳아도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각각 다른 네 개체가 한 가족이 되도록 준비하고 이끌어 주신 인연. 신앙 안에서 바른 교육을 위해 애쓰는 아들 내외의 모습이 아름답다. 손녀 빅토리아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친부모님을 감사함으로 기억하고, 양부모님의 자녀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소망한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