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에서
유숙자
그해 여름, 장마 끝이라 일기가 불순했으나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동학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당시 인생의 전환기에서 고민하던 때라 심산유곡에 묻혀 생각을 정리하려고 계획한 여행이다.
동학사 입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비구니들의 선원이라는 것과 계룡의 산세와 계곡은 신비가 달빛처럼 어려 있더라는 말을 듣고 환상에 젖어 무작정 떠나온 나는 첫발부터 환상이 깨어졌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사찰로 들어선 나에게 선뜻 방을 내어 주겠다는 암자가 없었다. 추워서 창백해진 얼굴에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보는 사람에게 섬뜩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경계의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방이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종일 버스에 시달려 지쳤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가 감기가 들려는지 몸을 떨 정도로 추워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산길을 따라 한동안 헤맨 후에야 길상 암이라는 암자에서 노스님과 함께 기거한다는 조건으로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몸에 스며들자 맥이 풀려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이튿날 늦게 눈을 떠보니 언제 비가 왔더냐 싶게 날씨가 화창했다. 듣던 대로 아름답고 싱그러운 산과 나무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울창한 나무와 숲에서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불순물을 정화해 주는 듯 몸이 가볍다. 고운 황토로 다듬어진 앞마당이 분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부드럽다. 마당 귀퉁이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앉아 계룡의 산세를 우러른다. 구름이 잠시 머물다 떠나고 바람이 이파리를 희롱하다 사라진다.
낯선 청년들이 한둘씩 모여들더니 나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앉는다. 이곳에 머문 지 오래된 듯 서로 친숙하고 이 낯선 나그네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다. 다음날도 그들은 틈틈이 시간을 내서 내게 와서 친구가 되어주려고 했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해서 찾아온 곳인데 뜻하지 않은 훼방꾼을 만난 셈이다. 그들의 담론은 철학과 문학에 관해서였다. 주로 헤겔, 칸트,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들과 만남이라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내 쪽에서 흠뻑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혹시 내게 딴 마음이라도?” 이런 야무진 꿈을 꾸며 경계했으나 그들은 인생의 선배답게 해박한 지식의 샘으로 나를 안내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을 바쁘게 보내느라 애초의 일들을 생각할 틈이 없었기에, 이참에 수려하게 잘생긴 계룡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카메라를 메고 가벼운 차림으로 암자를 나섰다.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지기에 서둘러야 했다. 여기저기 암자에서 동행하자며 따라오는 청년들의 훼방이 오늘만큼은 싫지 않다. 그들은 이곳 지리를 잘 알아 입이 벌어지도록 아름다운 장소로 나를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암자로 돌아오니 노스님이 환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빈방이 있으니 옮기시지요.”
“오늘 누가 떠났습니까?”
“아니요, 빈방은 늘 있습니다. 다만 첫날 비에 젖어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온 당신을 올해의 7번째 자살자로 생각했지요.”
스님은 카메라를 메고 나가는 나를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죽을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그들만 아는 직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실연을 당했거나 말 못 할 사정으로 세상을 비관한 사람이 남모르게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자살하기에 혼자 들어오는 젊은 여자에게는 대부분 방을 빌려주지 않는단다. 스님들이 늘 주의 깊게 살펴도 매해 10여 명 정도의 자살자가 생긴다고 한다.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의 감시를 받았던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머무는 청년들은 내가 무모한 짓을 할까 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조심스럽게 살펴봐 준 것이다.
내가 동학사를 떠나기 전날, 청년들이 갑사로 안내해 주었다. 갑사로 가는 길 중간 지점쯤 산정 뜰 왼쪽에 있는 오뉘 탑은 지순지결한 사랑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지닌 듯 수줍게 서 있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상원 대사가 지금의 이 계룡산에서 수도생활을 할 때였다.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밤,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움막 앞에서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너무 애처로워 두려움을 무릅쓰고 죽음까지 각오하며 가까이 가 보았다. 벌린 입속 목 부분에 커다란 뼈가 걸려 있어 빼주자 호랑이는 사라졌다.
몇 날이 지난 후에 지난번 그 호랑이가 기절해 있는 한 처녀를 데려다 주었다. 대사는 이 깊은 산중까지 어떻게 들어 왔는지 모르는 처녀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그 처녀는 상주에 사는 김 화백의 따님이었다. 대사는 한겨울이라 눈이 쌓여 길이 막혀 있으므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처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처녀는 산속에서 지내는 동안, 대사의 덕과 인품을 흠모하였기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부모에게 간청했다. 부모님도 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 부부로 맺어지기 바랐으나 대사는 거절한다. 마음을 돌리지 못한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연이라도 맺기 원해 계룡산으로 들어와 암자를 따로 짓고 평생을 오뉘로 지내다 입적했다. 그 후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오뉘 탑이라고 한다.
일찍이 외가는 기독교 사상을 수용할 만큼 진취적이고 개화 되어서 나는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자랐으나 종교와 상관없이 사찰을 구경할 기회가 많았다. 명산대찰이라 했던가. 여행을 좋아해 산을 찾다 보면 그곳엔 사찰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동학사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그 산행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의 해답을 얻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귓가에는 동학사 여승들의 독경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새벽 3시쯤 차가운 바위에 앉아 노래하듯 큰소리로 경을 외우던 여승들의 낭랑한 독경 소리는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와 더불어 멋진 하모니를 이루던 것을 기억한다.
동학사를 다녀온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지금은 보수하여 콘크리트로 고쳤다는 말을 들었다. 어릴 적 고향같이, 내 마음속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동학사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커다란 바위들을 세차게 때리며 절 앞을 가로질러 힘차게 흐르던 폭포 같던 개울, 울창한 수목 사이사이에 숨은 듯이 들어앉은 작은 암자의 모습도.
지금도 갑사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꼬불거리는 좁은 길일까. 오뉘 탑의 전설을 담고 묵묵히 서 있던 그 정사도 그대로 있을까. 자연 일부처럼 보였던 동학사와 그때 만났던 인연들이 그립다. 청년들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내게 보여준 타인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기에 문득문득 그때가 생각날 때면 동학사의 물소리가 내게 들린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