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
유숙자
어렸을 때 어머니는 섣달그믐날 밤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말씀하셨다. 행여 눈썹이 셀세라 밤이 이슥하도록 설음식 준비로 바쁜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빨리 잠을 자야 아침에 설빔을 입을 텐데 하는 마음과 일찍 자면 눈썹이 센다는 말에 졸린 눈 버텨가며 참고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겨울밤이면 메밀묵 사려, 찹쌀떡하고 외치던 구성진 음성과 소경 안마사의 피리 소리는 다시 듣고 싶은 내 어린 시절의 서정 소야곡이다.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처음 맞았던 섣달그믐 밤, 런던으로 새해맞이 구경을 하러 갔다. 해마다 치르는 연례행사로 런던 시민이 다 모인다는 트라팔가 스퀘어에는 스크럼을 짜고 노래 부르며 축배를 드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자정이 되기 10초 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모두 함께 “올랭 사인(Auld Lang Syne)”을 목청 돋우어 부른다. 이윽고 빅벤의 종소리에 마쳐 “Happy New Year”를 외치며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얼싸안고 키스한다.
우리는 차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새해를 맞게 되었다. 갑자기 몰려든 인파는 인도와 차도를 삽시간에 메워 차 안에 꼼짝 없이 갇히게 되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린다.
그때 남편이 유리문을 내리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차 옆을 지나가던 여자들이 다가와 키스하는 게 아닌가. 나는 갑작스러운 옆 사람의 행동에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랐으나 차를 에워싼 군중으로 꼼짝할 수 없어 이 민망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쪽의 유리문을 내리라고 두드리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속히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기다렸다. 군중이 조금씩 움직이게 되자 몇 명은 우리 차 앞부분에 올라앉아 노래 부르고 발랄하게 율동하며 밝아오는 새해를 맞았다. 해마다 그 행사 때 밀려드는 인파로 크고 작은 사고가 있으나 런던 시민은 트라팔가 스퀘어의 새해맞이 축제를 즐기고 있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며 열기가 더해진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아온 남편은 런던의 새해맞이 풍습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천연스럽게 그곳으로 데려가 당황하게 한 것이 괘씸했다. 아무리 다른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연례행사이고 기쁨의 표현이라 해도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화가 난 것이 아니면서 편안한 마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전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으로 봐서 내 심기가 불편했음을 말해준다. 정월 초하루 저녁, 집에서 회사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예의 그 사건을 이야기했다. 직원들은 새해맞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부인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이후, 의도적이 아니었는데도 여행 또는 모임이 겹쳐 트라팔가 스퀘어의 새해맞이에 참석하지 못했다. 모르기는 해도 엄처시하의 직원들이 그 행사를 TV로만 지켜보며 못내 아쉬워했을 것이 자명하다.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런던은 다채로운 행사가 많고 열광하는 시민들로 늘 새롭고 분주하다.
미국으로 오던 해 섣달 그믐밤은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긴 밤이 아니었나 싶다. 한 해를 보낸다는 서운함이 아니라 남편의 무성의에 화가 났다. 미국에 온 후, 처음 맞는 새해였기에 새날을 맞는 꿈으로 한껏 설렜다. 음식을 만들고 마실 것을 골고루 준비했다. 흰 레이스로 된 테이블보 위를 꽃장식을 한 다음 촛불을 밝혀 놓으니 나름대로 새해맞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이들은 모임이 있다며 초저녁에 외출했고 단둘이 남은 공간에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졸기 시작한 남편은 나의 설렘과는 달리 계속 동떨어진 행동만 보였다. 리모컨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양새가 조는 것 같아 텔레비전을 끄면, 보고 있는데 끈다고 하고, 조금 있으면 다시 존다. 나는 남편의 졸음을 쫓아 주려고 곁에서 계속 말을 걸었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드디어 코를 고는 것이 아닌가.
“봐요, 조금 있으면 새해가 되는데 좀 일어나세요.” 잠에 푹 빠져있는 남편을 보니 짜증이 나서 부드러운 말씨와는 다르게 세게 흔들었다. 바로 그때 남편이 용수철에 퉁기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뛰듯이 방으로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못 참겠어. 정말 더는 못 참겠어. 자, 여기 벌금 있으니 제발 나 좀 자게 해줘.” 내 앞에 내민 것은 한 장의 Check 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 표현대로라면 나는 졸지에 잠 안 재우고 귀찮게 하는 고문 부인이 된 것이다.
“이제 15분쯤 남았는데 분위기 깨지 말고 조금만 참아요.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야지. 지금 잔다면 여태껏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 온종일 준비한 음식은 다 어떻게 하라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이미 잠이 들었다. 나는 졸지에 돈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 책크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제는 나이 탓인지 새해가 와도 덤덤하다. 빅 애플을 터뜨리며 열광적으로 “Happy New Year”를 외치는 뉴욕커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분하다. 그런데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낯선 나라에서 경이롭기만 했던 런던의 새해맞이, 이국에서 첫 번 맞았던 트라팔가 스퀘어의 멋진 섣달그믐 축제와 남편의 키스 세레머니가 생각난다. 이민 초년병 시절,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젊어서였는지 분위기 있게 송구영신을 맞고 싶어 했던 섣달그믐 날, 밤이 새도록 올랭 샤인을 들으며 씁쓸한 기분으로 앉아 그 많은 음식을 거의 다 먹던 생각이 난다.
올해에도 섣달그믐이 왔다. 그저 시간만 서둘러 지나가게 했을 뿐, 별로 이루어 낸 것 없이 다시 이 자리에 섰다. 많은 세월을 맞고 보냈건만 언제쯤이나 뿌듯한 마음이 되어 한 해를 보람 있게 보낼지.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의 영원한 소망 아닐까? 산다는 것 자체가 만족이 없는 미완의 연속일 테니까. 다만 “새해에는” 하고 다시 각오를 새롭게 할 뿐이다.
이제 한 해의 끝에 선 오늘 밤은 나의 작은 공간에 추억들을 불 켜놓고 꿈도 걸어 놓고 세월과 함께 흘러가 잊고 지냈던 시간을 조용히 음미해 보리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조용히 마무리하리라.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