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피스 파크의 신부
유숙자
집 가까운 곳에 그리피스 파크(Griffith Park)가 있다. 파크하면 일반적으로 공원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름만 그렇지 규모가 제법 큰 산이다. 본래 그리피스라는 부호의 소유였으나 오래전 세상을 떠나며 시에 기증했단다. 도심지에 있는 데다가 경사가 완만하여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등산객들로 붐빈다. 그리피스 파크 초입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골프장이 있고 공원 곳곳에 바비큐 그릴이 있다. 백여 개가 넘는 등산로 이외에도 깊고 호젓한 오솔길이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 산 정상 천문대에서 내려다보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HOLLYWOOD”라고 쓴 대형 표지판을 세워 놓아 영화의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서 가까운 쪽의 등산로를 따라 산에 오른다. 정상 가까이 이르면 길이 좁아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확 트이며 새 둥지처럼 생긴 숲 속의 빈터가 나온다. 이곳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주춤거려진다.
어느 해였나, 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8월, 소리소문없이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같은 교회를 섬기는 S였다.
“저 결혼해요. 처음 입어 보는 웨딩드레스입니다. 오셔서 축하해 주세요. 장소는 그리피스 파크입니다.”
반가운 결혼 소식이었으나 장소가 그리피스 파크라는 것이 생소해 전화했다. 예식장을 빌릴 돈이 없어 그리피스 파크으로 정했단다. ‘돈이 없어.’라는 말이 가슴을 찔렀으나 ‘결혼한다’는 사실이 중요하기에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모두 그녀의 것이기 바랐다.
그날, 기온이 90(F)도가 넘는 정오에 담임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파란 잔디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축복을 부어 주시는 신의 은총 같았다.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들꽃이 꽃길을 만들었고 병풍처럼 둘려 있는 나무들이 8월의 신부를 한껏 축하했다.
딸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하는 신부는 오랜 가뭄 끝에 해갈을 맛본 나무처럼 싱싱해 보였다. 20여 명의 하객이 그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신랑은 인물이 준수하고 예의도 깍듯하여 호감을 주는 인상이다. 신부를 극진히 보살펴 주는 모습이 듬직했다. 고생 끝의 낙이라더니 인생 후반은 서로 의지하며 잘 살 것 같았다.
결혼 후, 가끔 전화를 주던 그녀로부터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끊겼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그러려니 했다. 우리가 얼마나 그녀의 행복을 바랐던가. 과거 10여 년 동안 그녀에게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미력이나마 보태느라 애써오던 주변 사람들은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도했다.
해가 바뀌고 다시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에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성이 밝지 않다. 남편이 흔치 않은 병에 걸린 것 같다며 울먹였다. 병원에서도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다고. 게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서울에 계신, 아직 뵌 적 없는 시어머니가 위암으로 입원하셨다는 연락이 왔단다. 병명도 모르는 남편의 간호와 시어머니의 입원 소식은 그녀의 좁은 어깨를 조여오는 이중고였다. 그녀의 남편은 외모는 반듯하나 애당초 무직자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제까지 힘겹게 살아온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친지들은 잘살아 주기 바랐는데 남편이 곁에 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실망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결혼 전에 저질렀던 모종의 사건이 발각되어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결국, 결혼하고 1년 만에 행복했던 삶은 기약 없는 생이별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삶은 바닥을 헤맸다. 매달 남편과 시어머니 약값을 송금하느라 세탁소에서 12시간 일도 모자라 밤늦게 식당일까지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그만큼 고생을 했으면 결혼을 신중하게 생각했어야지 결혼 1년 만에 이게 뭐람. 직접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서울에 돈 보내는 일 그만 해요. 기약도 없는 사람이잖아. 정신 차리고 아이들과 살 궁리 해야지.’ 친지들은 나무람이라기보다 진정 연민의 마음으로 충고했다. 그녀도 그 말의 참뜻을 안다. 자신이 서울로 가서 산다면 모를까 남편이 다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삶이라는 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잖은가.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 건 난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왜 그리 쉽게 하는가. 타는 가슴이 나만 할까. 그녀는 자신을 조용히 지켜봐 주기 바라지만 주위의 관심은 끓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기에 불행해지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첫 남자는 외국인이었다. 사실혼의 형식이었으나 동거인으로 살다가 헤어졌다. 서로 필요 때문에 만났기에 S는 원하는 것을 해결했고 그는 몇 년간 숙식을 편하게 받았다. 종일 일을 해도 힘든 줄 모르고 남편이라 받들며 살았다. 인간의 삶이란 수학적인 공식 같지 않기에 약속과 관계없이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것은 어쩌면 그녀가 원했기에 생긴 일이다. 비록 목적은 달랐으나 살다 보니 편했고 그런대로 별다른 인생이 있을까 싶었기에. 상대방 의도를 한 번도 떠보지 않은 체, 아이 낳고 살았으니 가정을 이루었다 생각했다. 상대방도 같을 줄 알았다.
동상이몽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 남자는 계약에 충실했고 아이들은 그녀가 원하기에 베푼 자선쯤으로 생각했다. 결국, 계약 만기일이 지난 며칠 후, 그는 S와 가장 친한 친구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 한 마디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관계가 그렇게 끝났다.
S의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그것을 메꾸려 알코올을 입에 댔고 급기야 음주 운전에 사고까지 겹쳐 차를 뺏기고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보았다. S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았다. 그 시절에 우리 곁으로 왔다. 미력하나마 10여 년간을 꾸준히 도와주었다. 세월을 지나며 그녀의 가슴엔 한이 쌓여갔다.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떳떳하게 하객들로부터 인증받는 격식을 갖춘 예식을 올리고 싶었다. 그 소망이 이루어졌으나 1년 만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인간이 가를 수 없나니.” 주례 목사의 말씀은 그녀에게 계명이며 존재 이유다. 지금은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으나 그리움으로 애태울 가슴이 있지 않은가.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으나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힘이 생긴다.
미국에 와서 산 지 23년 만에 그녀는 처음으로 휴가를 얻었다. 가장 한가한 1월에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움으로 한 켜, 두 켜 서리서리 싸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밤을 새워가며 한 가닥씩 풀어내고 싶었다.
해가 바뀌고 두 번째 날,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를 받았다. 투병 중이던 남편이 병고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세탁소를 찾았을 때 그녀는 남편의 양복을 품에 안은 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감색 정장이에요. 키가 작아서 많이 줄여야 해요. 이 양복을 입혀 놓으면 무척 멋질 텐데. 감색이 유난히 잘 어울리거든요.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녀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눈에 섬뜩한 빛이 일었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