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음반
유숙자
그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의 밤하늘은 칠흑빛으로 어두웠다. 그 속에 흩뿌려진 은구슬. 온 시가가 정전되어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 이렇게 많은 별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을 내 생전 본 적이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나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 같이 극심한 공포였다. 집도 몸도 흔들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며 찻잔이며 모두 곤두박질하여 거실이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하늘의 별들은 황홀하기만 하다. 밖에서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다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우리 가족은 모두 식탁 밑에 엎드려 꼼짝하지 못했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일까. 사이렌을 계속 울리는 차 소리가 절박하게 들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엄청난 공포의 순간에서, 오로지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만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오금이 떨어지지 않아 밖을 내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위가 잠잠해지고 흔들림도 멎어 식구들이 모두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나는 철옹성 같던 식탁 밑에서 겨우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 언제 다시 일어날는지 모르는 여진의 불안감만 키우고 있어 무서웠다. 답답했다. 어서 새벽이 밝았으면 하는 기대로 커튼을 열어젖혔다.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별들. 좀전의 공포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늘 가득 펼쳐진 그 찬연한 빛이 황홀했다.
마음이 울적할 때나 머리가 정리되지 않을 때 버릇처럼 타워 레코드 샵(Tower Records Shop)을 찾곤 했다. 고전음악이 많은 그곳은 음악을 들어보고 고를 수 있어 좋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좋아하는 연주자의 새 음반이라도 만나게 되는 날에는 기분이 상쾌해 일상에 쌓인 삶의 무게를 잊게 해 준다.
타워 레코드 샵은 발렌시아에 살 때부터 다니던 클래식 전문점이다. 노스리지 지역에 있어 거리가 좀 멀기는 해도 글렌데일로 이사 온 후에도 계속 찾았다. 본래 여기저기 잘 옮기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으나 음악에 박식한 미스터 브라운 때문이다.
이곳 남가주는 유럽이나 미국의 동부 같지 않아서 클래식 음반이 다양하지 않다. 때로 동부로 주문하고 몇 주 걸려야 도착하기에 희귀한 음반은 금방 손에 쥘 수 없어 불편했다. 음반을 주문할 때마다 그는 드라마나 영화라면 시대를 망라하여 거의 갖춰져 있으나 음반은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곳에는 세계적인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가 있음을 강조했다.
지난 1월 초순, 스타바트 마테르(Rossini : Stabat Mater)를 사러 갔을 때 내가 찾는 연주가 없자 다른 지점까지 연락해 보다가 여의치 않아 동부로 주문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났으나 지진에 놀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 2월 말쯤 타워 레코드 샵에 갔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예전의 모습이 아닌 노란 줄에 묶여 있는 네 벽뿐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진의 진원지가 노스리지였건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타워의 모습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허망하고 무언지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미안함, 그간의 무관심했던 날들이 겹쳐져 착잡한 마음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벤추라 불러바드에 있는 타워 레코드 샵으로 가 보았다. 그곳은 내가 찾는 음반이 없을 때마다 브라운이 전화하던 곳이었다. 거기에 스타바트 마테르가 있었다. 음반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음반을 받아든 점원은 나를 찬찬히 훑어보며 이름을 물었다.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내 이름의 꼬리표가 붙어있는 주황색 플라스틱 백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그는 이 음반을 전하게 된 사유를 이야기했다.
음반이 도착하면 내게 전화 주기로 했던 브라운이 무너져 내린 건물더미 속에서 고객의 명단을 찾을 수 없어 연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벤츄라 블바드와 웨스트우드 두 곳에 음반을 맡겨 두었다. 주문품이라 틀림없이 찾으러 올 것이고 주변 가까운 곳에서 다시 음반을 살 것이니 키가 크고 얼굴이 희며 눈이 큰 중년의 동양 여성이 스타바트 마테르를 찾거든 이름을 묻고 자신이 맡겨 둔 음반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6개월가량 보관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노 부모님께서 계신 콜로라도로 떠났다 한다.
스타바트 마테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책형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표현한 이 음반을 소중하게 가지고 차에 돌아와 플라스틱 백을 열어 보았다. 음반에 조그마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
“연락을 드리지 못해 걱정됩니다. 이 음반을 꼭 찾아갈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부활절 음악회 멋지게 하세요. 노스리지의 타워가 복구되면 다시 올게요. 직접 전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 Adrian Brown-
브라운은 음악 하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분에 가족 모두가 악기에 익숙하다. 그는 바이올린을 공부했고 대학 오케스트라에서 촉망받기 시작할 무렵 사고로 왼쪽 팔이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그 사건은 한 청년을 예술가에서 철학도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음악을 소개하는 사람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이란 값진 대가를 치르고 얻은 철학인 브라운이라고 남의 이야기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한창 꿈을 펼치려던 청년기에 좌절한 그는 절망의 긴 터널을 지나며 많은 것을 체험했으리라. 그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음악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위로 삼고 그곳에 있었던 게 아닐는지. 누구나 선망하는 연주자의 자리에서 그 갈채와 영광을 가슴 깊은 곳에 상처로 간직하면서-. 그곳 클래식 음악실에서는 바이올린 연주가 주를 이루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마음의 떨림으로 마지막 카텐짜 까지 함께 연주하고 현을 끊어 버렸으리라.
오랫동안 한 곳만 다니다 보니 좋아하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알아서 새 음반이 들어오면 권해 주던 브라운. 언제쯤 그가 수줍은 듯 환한 미소를 머금고 타워에 서게 될는지. 나는 그의 진실한 마음을 송두리째 전해 받은 것 같아 스타바트 마테르를 가슴에 꼭 안았다. 참으로 순수한 마음과 신의를 느끼게 하는 기쁨, 그의 눈동자가 눈에 밟혀 발길이 돌아서 지지 않는 쓸쓸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1999)